인 자(人子), “고난 받는 심판의 주”
기독교 신앙고백에서 가장 익숙한 예수님에 관한 호칭은 단연 “그리스도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나사렛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애착을 가지고 빈번하게 사용한 자기 지칭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희랍어로 “호 후이오스 투 안트로푸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즉 “인자 (人子, son of man)”입니다. 이 표현은 복음서 내에서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만 발설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닙니다. 예외가 있다면 무리가 예수님의 말을 인용하며 “이 인자는 누구냐”라고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해 질문할 때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기 교회 성도들이 스데반의 순교 직전 환상 등 극히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 예수님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초대 교회는 예수님을 “주” 또는 “그리스도”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자기 지칭을 위해 이 낯선 호칭을 고집했을까요? 초기 교회는 왜 이토록 중요한 예수님의 호칭을 신앙고백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을까요?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아람어 관용구의 배경과 구약 성경의 맥락을 살펴봐야 합니다. .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었던 아람어로 “인자 barnasha”는 특정한 타이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곡하게 표현하거나 “인간”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실 때, 그것은 단순한 일상어를 넘어 독특한 “현재적 권위”를 행사하는 타이틀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지칭하며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을 가졌다고 선포하며,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인자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유대교 관념에서 죄를 사하거나 율법의 핵심인 안식일을 다스리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속한 영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아들”이라는 가장 낮고 보편적인 언어의 옷을 입고,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초월적 권위를 지상에서 행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대중적 메시아 칭호 대신 “인자”를 선호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당대 유대인들이 가졌던 정치적이고 군사적 메시아인 세속주의를 전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서에서 인자 고유의 핵심 사명은 영광이 아닌 “고난과 죽음”으로 점철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직면할 미래에 관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은 인자가 영웅적으로 승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어야 하는 운명임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는 구약 시편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의인”의 모습과 이사야서가 예언한 “여호와의 종” 에 관한 모티프를 “인자”라는 하나의 인격 안에서 융합한 결과였습니다. 영광의 메시아를 기대하던 제자들에게 고난받고 버려지는 인자의 초상은 충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자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묘사한 인자의 궁극적 국면은 강렬한 우주적 영광과 맞닿아 있습니다. 종말의 때에 인자는 “큰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올 것이며, 심판자로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고 왕권을 행사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영광 가운데 다시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 때에 세상 모든 나라가 그 앞에 모일 것이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인자가 사람들을 나눌 것이다.”
이 장엄한 선언은 고대 묵시 문학인 다니엘서 7장의 환상을 고스란히 배경으로 합니다. 다니엘서에는 밤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옛적부터 계신 이(하나님)로부터 영원한 권세와 나라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정경인 에녹서나 에스라서에서도 이 인자는 신적 기원을 지닌 초월적인 메시아로 묘사됩니다. “내가 천사에게 물었다. ‘저 인자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습니까?’ 천사가 내게 대답했다. ‘이분은 의를 가지신 인자이시다. 이 인자가 왕들과 강력한 자들을 그들의 침상에서 일으키고, 강한 자들을 그들의 왕좌에서 몰아낼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다니엘이 예언한 그 종말론적 심판자이자 하나님 우편에 앉을 신성한 대리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의 신성(Divinity)을, 그리고 “인자”는 예수님의 인성(Humanity)을 표현이라며 이분법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 배경을 오해한 심각한 오류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성경과 고대 문헌 속 “인자”는 오히려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가장 강력한 신성”과 심판의 권세를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도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초기 교회가 이 호칭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인자”가 예수님의 고유의 독특한 자기 지칭 관용구였음을 존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헬라문화권(이방인) 청중들에게 “인간의 아들”이라는 직역된 표현이 자칫 예수님의 신격과 존엄을 모호하게 가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인자”를 “주 Lord”나 “그리스도”처럼 의미가 명확한 언어로 번역하여 선포했습니다.
사도 요한의 증언처럼 인자는 십자가라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높이 들려 영광을 받았고,”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하늘로 올라간 존재입니다. 인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에서 죄인을 섬기며 고난을 당하셨으나, 동시에 영원한 심판의 권세를 쥐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사명을 담은 구별된 단어입니다. 인자라는 칭호 속에는 기독교가 고백하는 낮아짐과 높아짐, 인성과 신성의 정교한 신비가 고스란히 녹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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