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존재가 담긴 그릇”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향기는 그대로다”라고 말했지만, 이름에 관해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는 오히려 그 반대를 증언해 왔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를 담는 그릇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존재를 안다는 것이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와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원시 사회의 사고방식을 연구하여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임을 역설한 뤼시앵 레비브륄은 이름은 식별을 위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름은 단지 비유 차원을 넘어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족에서 “바다 독수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독수리를 닮은 사람이 아니라 그 존재와 운명을 함께 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전설 속 인물이 어떤 동물의 이름을 가졌을 때 이는 단순한 비유나 명칭의 유사성을 넘어서서, 그 인물이 해당 종(種)의 본질과 완전히 결합되어 있음을 뜻하며, 그의 행동과 성품이 그 동물의 의인화된 결과물로 간주됨을 의미합니다. 원시 부족들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정교하고 엄숙한 의식을 치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름은 존재를 완성하는 영혼의 실체였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노마”는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또는 실제적인 성분으로, 이름이 상실되는 것은 그의 본성이 파괴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타인의 이름을 아는 것이 곧 그 사람에게 미신적인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법적 통로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애니미즘적 성향은 신들의 지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이름을 가진다는 다명성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후에 스토아 학파는 그리스의 모든 신의 권능을 “제우스”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제우스는 참 신의 이름이고, 그 이름은 신성한 권능 자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이름의 효능과 마법적 신념은 고대 이집트의 민중 생활을 담은 파피루스 문서들에서 더욱 생생하게 발견됩니다. 고대 마법 파피루스에 따르면, 누군가의 이름을 소유하거나 부르는 행위는 그 소유자로부터 말하는 사람에게로 직접적인 힘이 전달됨을 뜻했습니다. 때로는 해를 가하고 싶은 대상을 저주하기 위해 종이에나 마법적 형태로 이름을 적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신의 이름을 정확히 부름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신과 동일시하여 신성한 보호를 획득하고자 했습니다. 마술사들이 자주 변하는 신의 진정한 이름을 알아내려고 했던 이유는 이름은 그 자체로 자신들에게 작용하는 강력한 신의 위격이자 온 세상을 통치하는 궁극적인 실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법적이고 수단적 이름 이해는 성경의 계시 속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영적 현실로 나타납니다. 구약 성경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에서 오노마는 1000회 이상 등장하는데, 이름은 인간의 인격과 동일시 되었으며, 하나님의 이름은 곧 그분의 거룩한 임재와 제한 없는 권능을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이르러 오노마와 그 동사 형태인 “오노마조”는 총 228회 사용되며, 이름이라는 단어가 가장 의미 있게 사용된 경우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관련된 경우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주된 사명이 제자됨이라고 선언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름이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본질과 권능 안에서 완벽한 통일을 이루시는 단 한 분이심을 선포하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은 그분의 모든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은 그분의 이름과 동일시되고, 그분의 사랑은 그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함이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초점은 하나님, 곧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관념이 아닌 실제적인 구원과 축복의 통로입니다. 한 개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존재의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영혼과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수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선한 행실과 기도는 오직 예수의 이름 안에서 그 가치와 응답의 보증을 획득하며, 교회가 세상 앞에 선포해야 할 유일한 복음의 주제 또한 바로 복음의 요체인 주 예수의 이름 그 자체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이름에 대한 인류의 고찰은 문학적 유머와 통찰 속에서도 끊임없이 회자되어 왔습니다. 미국의 유머 작가 조지 에이드는 “이름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며 이름이 지닌 가치를 역설했습니다. 러너드 핸드 판사는 스스로 성을 바꾼 이에게 “자수성가한 사람은 스스로 만든 이름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뼛속 깊은 통찰을 남겼습니다. 윌리엄 해즐릿은 별명을 만드는 행위를 인간의 본질을 왜곡하는 “악마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돌”이라며 경계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이름이 명예와 왜곡, 자아 성취와 오용 사이를 오갈 때, 온 우주에서 가장 숭고하게 빛나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주술적 탐욕으로 소유할 수 없으며, 인간의 지혜로 제한할 수 없는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름이 곧 존재의 본질이라면, 복음은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본질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초대장입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이름을 부르고 그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의 잃어버린 본질과 참된 정체성 또한 온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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