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나
차마 아이가 죽는 것을 보지 못하겠어서 그 아이에게서 좀 떨어져서 울고 있는 엄마가 있습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아이와 거리를 두었으나 여전히 그 엄마가 앉은 방향은 아이를 볼 수 있는 쪽입니다. 네. 브엘세바 광야에 주저앉은 이는 하갈입니다 (창 21:14-21). 하늘을 향한 엄마의 울음 소리가 도화선이 되었는지 하나님은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엄마의 마음을 다독이십니다 (17절). 살 길을 내십니다. 목마름에 죽어가는 아이를 위해 샘물을 그 엄마 눈에 띄게 하신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이를 통해 이룰 자손의 번영을 하갈에게 약속하십니다. 어쩌면 이 약속은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의 아이들을 향한 최고의 바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엄마’ 이전 한 개인인 하갈 자신 스스로를 향한 가장 큰 바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답에 대한 추정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약속의 이야기 훨씬 전에 등장한 에피소드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은 고대 사회의 ‘종’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주인의 학대를 피해 ‘자유’를 찾아 도망 나온 종의 모습입니다. 하갈은 주인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여기서 만나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분명 주인의 집을 떠나 광야에 서 있었으니까요. 그들의 신이니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와 함께 있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여기서” 하나님을 뵈었는지 감탄합니다 (13절). 도망 나왔으니 ‘감시’를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텐데, 하갈은 오히려 “살피시는 (보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하갈은 그의 무소부재(omnipresence) 하심과 그 돌보심에 이미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13절). 살기 위해 자유를 원했으나 편만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그런 속성을 소유한 하나님을 뵌 것이, 하갈에겐 자유를 원한 이유인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 여인이 경험한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은 시편 139편, 다윗의 시에 잘 나타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도망/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의 임재 하심이 “주의 영,” “주의 앞”이란 단어로 표현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법한 장소로는 “하늘”과 “스올” 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수사학적 표현 기법이 등장합니다. 한국어로는 아직 정착된 단어가 없는 “Merismus/ Merism (메리스무스/메리즘)”이라는 문학적 기법인데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 반대되거나 대조적인 두 부분을 조합하여 표현하는 수사법입니다. 간혹 양단법, 총칭어법, 상극법, 분절법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이 대표적 예입니다. 헬라어 첫 알파벳 ‘알파 (A)’와 마지막 알파벳 ‘오메가 (Ω)’를 사용하여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처음과 마지막 뿐 아니라 그 사이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높음의 끝인 ‘하늘’과 화자가 생각할 수 있는 깊음의 끝인 ‘스올’을 언급함으로 하늘과 스올 뿐 아니라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이야기 합니다. 9절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글 번역에서는 장소가 ‘바다 끝’ 하나만 나와, 대조적 표현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 “새벽”은 동트는 동쪽을 의미하고, “바다”는 이스라엘의 지리적 위치상 해가 지는 서쪽을 의미합니다. 즉, 양쪽 끝을 지적해서, 8절에서는 수직적으로 모든 곳, 9절에서는 수평적으로 모든 곳을 말합니다. 공간적 대칭 구조를 입체적으로 드러내서 사방 어디에서도 빈틈 없이 편만하신 하나님을 시각적으로 상상하게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그 모든 곳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붙드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국지적으로 중동의 한 곳에 머무셨던 예수님도 무소부재 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과 배를 타고 계셨고, 바리세인들의 집이 아니라 삭개오의 집에만 방문하셔서 원성을 들으셨던 것처럼 분명 특정 장소에 한정해 계셨습니다. 그러나 백부장과 거리에서 만나 말씀하시면서 백부장의 집에 있는 하인을 고치시고 (마 8:5-13), 또 한 집에서 머무시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방문을 받으셨는데 그녀의 집에 있는 딸 또한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습니다 (막 7:24-30). 그러기에 그때도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동시에 곳곳에서 고백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아이의 고통을 마주할 수 없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엄마, 하갈에게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고, 함께하라고 용기를 주신 하나님은 먼저 사람 하갈을 만나 임마누엘의 하나님임을 보여주셨었습니다. 어머니인 여성들이 어머니이기 전, 한 개인으로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어머니 날이 되길 바랍니다. 또, ‘엄마’와 ‘사람’이 상반되는 두 부분이 아니라 Merismus 수사법적 표현이 아닐지라도 그 사이 여러 사람의 유형인 여인들에게 하나님의 인격적 돌보심이, 임마누엘의 고백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김카리스 (구약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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