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매일 경험되는 부활(마 26:21-35 )
토론토 강림교회 김주엽 목사
(서두) 초대교회의 부활절인사는 “인도자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회중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두 핵심은 성탄의 축복과 부활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데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셔서, 인간의 아픔과 고통, 눈물을 헤아려 주셨다는 것이 성탄의 축복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조롱당하시고 죽으셨지만,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생명의 기쁜 소식은 우리 믿음의 기초이자 신앙의 든든한 골격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탄도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은 항상 두 가지로 나눠야 합니다.
하나는, 선포(proclaim) 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문제에 대한 담대하고도 분명한 신앙고백과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셔서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셨고,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은 선포입니다. 세상과 상대방이 듣거나 듣지 않거나, 믿거나 믿지 않거나 결코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우리 신앙의 영원한 고백입니다.
다른 하나는 메시지(preaching)입니다. 이것은 적용, 실천, 의미의 문제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하고 적용하며 오늘의 메세지, 즉 내 신앙과 삶의 메시지로 풀어 해석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선포에만 강조하면, 역사적 사실과 학문적 입증에만 수고를 다합니다.
반면에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지 않고, 부활의 의미만을 강조하며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떻게 해석하며 살아야 하는가? 을 주장하면 건강한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느 한쪽에만 강조되고 치우치면 온전한 부활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설명)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고난에 살펴보았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이 되었던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후에 모습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 버릴 자가 있을 것이다!” 예언하십니다.
우리는 이 인물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이 오늘 밤에 다 나를 버릴 것이다! (31절) 그리고 흩어질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완곡하게 말씀하셨지만 다 도망 갈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반응합니다. 다른 사람들, 제자들은 몰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33절) 라고 장담하였지만 오늘 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34절) 라는 예언이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 받는 대제사장의 관정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비공식적인 심문 앞에 자신의 호언장담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실존이었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크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였던 제자들이지만, 목숨의 위협과 허무하게 잡혀 가시는 예수님의 무기력 앞에서 도망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미리 예언하셨던 예수님은, 내가 살아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32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빈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천사가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28:7), “또 빨리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See you there, Galilee)
“내가 살아난 후에” ☞ 이 말씀은 전적으로 인간이 할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저 선포할 뿐입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 이 말씀은 인간의 실수, 곧 선생을 팔아먹고, 구주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부인하는 제자들을 심판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부활의 참 축복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모든 권력자들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복수하시고 처벌하는 심판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갈릴리 오셔서 옛날로 돌아가 배신의 부끄러움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제자들에 대한 믿음과 사명에 대한 회복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패로 낙망하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날마다의 부활을 경험케 하시는 은총입니다.
실패와 실수가 없는 인생은 해아래에 없습니다. 실패와 우리의 실수는 자신의 가치와 존재이유까지 흔들어 놓는 경험을 합니다. 사람됨의 회복과 그리스도를 향한 부르심의 온전한 회복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CF) 부활절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중의 하나는 YB밴드의 “나는 나비” 입니다. 이 노래의 작사가는 박태희라는 베이스를 치고 서브 보컬을 하는 분인데, 교회의 안수 집사입니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앞길도 보이지 않아 나는 아주 작은 애벌레
살이 터져 허물 벗어 한 번 두 번 다시 나는 상처 많은 번데기…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거미줄을 피해 날아 꽃을 찾아 날아 사마귀를 피해 날아 꽃을 찾아 날아
꽃들의 사랑을 전하는 나비……
Flying butterfly God save me.
중간 영어 후렴부분에는 God Saves Me! 라는 고백도 함께 나옵니다. 부활절의 상징 중의 하나가 바로 나비 아닙니까? ‘작은 애벌레’가 변하고, ‘상처 많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질적인 변화, 가치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은총은 나를 어둠의 자녀가 아닌, 좌절과 실수, 그리고 낙망의 자녀가 아닌, 회복과 소망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약속의 자녀로 세워줍니다. 그리스도안에 질적인 변화를 경험한 우리는 인생의 거미를 만나고 사마귀를 만나고 사나운 바람과 비를 만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연약한 삶 가운데 갈릴리의 제자들을 찾아가 주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날마다의 삶 가운데 회복과 소망을 가지고 담게하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2. 부활을 경험하며 산다는 말씀은 우리의 눈과 지경이 주님의 시각과 안목으로 조정당하는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나아가는 순례자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그 땅의 통치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안목과 뜻과 계획아래 내가 조정당하고, 안목이 바뀌고, 나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부활의 주님과의 오랜 대화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여정을 방향 틀고,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3:1-4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Cf) 요즈음 자주 언급되는 F. 에즈베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아래 40년 터울의 미국 선교지의 감리교 운동 신앙운동가인 F. 애즈베리 이야기에 대한 오해와 사운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미국의 독립운동을 마땅치 않게 여겼던 요한 웨슬리가 이러한 상황가운데 미국 감리운동의 독립을 외치며 감리사로 파송되었지만 F. 에즈베리가 감독행세를 하자, 권력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에즈베리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서운해합니다. 선교지의 현실, 곧 미국 국민들이 독립하고자 하는 이유와 마음을 너무 모른다! 는 응답입니다.
결국 웨슬리의 실수였습니다.
두번째는 요한 웨슬리가 진정으로 서운한 것이 있는데 노예 해방운동에 대한F. 에즈베리의 침묵입니다. 그 이유는 남부의 부흥하는 교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는 F. 에즈베리가 복음의 실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결실을 맺어가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오해도 풀고, 존중하고 존경하는 모습!이 이런 기록에 담겨 있습니다.
“옥스퍼드에서 처음 시작된 이 작은 누룩은 점점 멀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안의 진리들을 보고 나서 사랑으로 그 진리를 영접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이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 희락으로 충만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의 모든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마침내 한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 여파는 영국의 북부, 아일랜드로 뻗어나가, 몇 년 후에는 뉴욕, 펜실바니아, 뉴펀들랜드, 노바 스코샤와 같은 북아메리카의 여타 지역에까지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 이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었으나 몇 년이 지나자 ‘커다란 나무로 자라 큰 가지를 내게 이르렀습니다. “초기 600명의 감리교회인들이 1813년 미국에는 171,448명의 백인과 42,850명의 흑인 교우들이 모이게 되었던 것은 결국 F. 에즈베리의 충성과 헌신인 것을 인정하고 축복하는 모습입니다.
Cf) 최주훈 목사가 작년 고난주간 묵상으로 올렸던 사진,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의 시각으로 인간의 군상을 그려낸 작품! 우리의 구원자는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What our Savior saw from the cross?), 프랑스의 화가 제임스 티소의 작품.
“부활절은 진짜 죽음인 사망으로부터, 육체와 영혼의 죽음으로부터, 온 인류의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 행사에 힘입어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절은 인간의 죄와 죽음에 관해, 하나님의 사랑과 죽음에 관해 말합니다…. 부활절은 죄 지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 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의 모든 행위에 찾아온 새로운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아갑니다. 부활절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By 디트리히 본훼퍼의 전집중에서)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을 부활로 산다는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넓고 큰 은혜의 세계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디며 깊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경계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경계와 울타리 안에 내가 들어가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2023년의 부활절의 은혜와 승리가 여러분들을 더 넓고 깊은 은혜의 세계로 초대하는 발걸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