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고니온으로
이글스필드한인교회 장성훈 목사(사도행전 13장 44-52절)
좋으신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돌아가는 사람, 더 나아가는 사람들
구브로에서 서기오 바울을 만나서 전도한 후에 바나바와 바울은 배를 타고 밤빌리아로 갑니다. 오늘날 밤빌리아는 튀르키예 남부입니다. 버가에 도착했을 때 일행 중에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성경이 밝혀 주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바나바와 바울 일행이 새롭고 낯선 곳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한 가지는 요한처럼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더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새롭고 낯선 상황 앞에서 익숙해서 심적으로 편안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고, 반대로 모험심을 발휘하여 도전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조건 옳은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돌아가는 편이 아닌 나아가는 편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이유는 사명 때문입니다. 버가에 도착한 바나바와 바울은 비시디아 지역에 있는 안디옥으로 향합니다. 지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안디옥은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실 안디옥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거나 교류가 활발한 교통의 요지도 아니고 큰 도시도 아닙니다. 지리적 전략상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버가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장 안디옥으로 갑니다. 이것은 바보를 떠날 때 바나바와 바울의 마음 속에 다음 방문지가 이미 안디옥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안디옥 지역에서 발견된 몇 비문들이 구브로의 총독 서기오 바울 가문과 이 지역의 특별한 관계를 말해준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서기오 바울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해줄 것을 부탁했을 가능성이 높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이라는 목적지에 대한 사명의식이 분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바나바와 결별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요한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일은 선교팀 전체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과 바나바는 바보에서 바예수를 만났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바예수는 대적이었지만 요한은 동료였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도전은 오히려 우리를 견고하게 합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면 옷깃을 더욱 여미게 되고 강력한 적군이 다가오면 성문을 더욱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내부가 무너지면 사람이든 공동체이든 허무하리만큼 쉽게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마음 즉 내면을 지키고 방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기로 결정하였을 때 선교팀 모두가 충격받고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을 것이고, 이때 누구보다 바나바의 심정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바나바에게는 젊은 조카 요한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생길에 불러들인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선교팀을 어렵고 힘들게 만든 것이 요한을 데려온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책하는 마음에 선교팀에서 떠나 요한과 함께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후에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요한을 포기하지 않았고 요한에 대한 책임감을 놓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복음에 대한 책임감과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가져다 준 사명감이 바나바를 붙들었고 요한이 떠난 후에도 바나바를 더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사명은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어 주는 닻과 같습니다. 삶과 신앙 여정에서 고난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앞으로 더 나아가게 하는 힘은 사명감으로 부터 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여정처럼 우리가 가는 길에도 후퇴하게 하고 주저 앉게 할 만한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이 연속적으로 닥치기도 하고 희망과 절망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 내리락 할 수도 있습니다. 역경과 시련이 파도처럼 이어져 오면 맞설 힘조차 없게 됩니다.
그럴 때면 잘못을 찾아보기가 쉽습니다.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들 때도 있고, 실제로 구체적인 어떤 죄나 허물에 대한 생각이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죄가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면 회개하면 됩니다. 책임감있게 응답하면 됩니다.
우리는 어둠으로 이끄는 죄책감에는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어둠으로 이끄는 죄책감은 죄책감 자체에 우리를 매어둡니다. 움츠러들게 하고 불안에 사로잡히게 해서 무기력하게 하고 결국 죄책감에 매몰된 채 낙담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게 합니다.
죄책감은 올무가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우리가 딛고 앞으로 나가게 할 디딤돌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부름받았는지를 놓치지 않으면 올무가 아니라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결정한 요한처럼 우리에게도 포기하고 주저앉을만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히10:39)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마침내 그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부름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흔드는 일들이 여러분 앞에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이 부르심을 잊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여러분의삶의 자리에서 사명을 따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는’ 믿음과 소망의 발걸음을 걷는 은혜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인내의 역사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와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갑니다. 회당장은 바울이 랍비라는 것을 알아보고 권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합니다. 오늘 바울의 설교는 우리가 앞서서 보았던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긴 이스라엘의 역사의 흐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개인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와 같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에 대한 이런 접근은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신앙을 무의식 중에 사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는데서 현실적인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균형잡히고 온전하게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복음의 공적인 측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도 스데반도 그리고 바울도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큰 이야기를 복음의 줄기로 삼고 있음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구원을 등한시 하거나 내가 만난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사사롭다는 뜻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울의 이야기를 읽고,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으며 예레미야 시대를 살펴 보는 것은 그 사람들 각각과 하나님에 대한 교훈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긴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꾸준하게 해오셨는지를 깨닫고 알고 배우기 위함입니다.
역사는 큰 이야기이고 나와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역사야 말로 오늘을 알고 내일을 가늠하게 하는 오래된 미래요 하나님의 계시의 확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일반 역사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대해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그것을 자신의 말로 ‘하나님의 인내로서의 역사’ 혹은 ‘하나님의 인내의 역사’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출애굽 시키신 이래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세상의 잘못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 하나님의 인내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미혹되고 우상을 섬기며 힘이 강한 나라들을 하나님보다 더욱 의지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해서 땅에서 쓸어버리지 않고 오래 인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절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온 세상의 죄에 대한 공의의 하나님의 인내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넘기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죽기까지 참으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는데까지 인내하신 것입니다.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인내하고 참으시는 분이시로구나.’ ‘우리가 인내하려면 주님의 모범을 따라 죽기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로구나 그런데 죽을 때까지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니 나는 인내심이 부족하구나.’ ‘억울하지만 힘이 없으니, 혹은 억울하지만 그리스도인이니 그저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할 뿐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기다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우리와 세상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꾸준한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실한 전진, 곧 나아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에 무감각하시거나 우리 죄가 일정한 분량까지 차기를 기다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기다림이자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구원의 길을 여신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내로서의 역사라는 바울의 말은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기까지 쉬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2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왕으로 선택되었고, 그것이 2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설교에 따르면 하나님의 인내의 열매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마침내 무엇을 성취하시는지 그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 부활입니다. 죄를 정복하고 죽음을 이기고 마침내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실 것임을 보여준 결정적인 사건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묻는 것은 무죄한 한 사람을 억울하게 죽음에 이르게 한 죄가 있다는 차원의 고발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이방, 나와 온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왕을 거역하며 살았음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고 성령에 의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내가 어떤 죄를 지어도 내가 아무리 악하게 산다고 해도 나는 이미 예수를 믿고 있으니 구원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복당할 대상인 죄의 종 노릇하지 않고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회개하고, 예수 믿고, 죄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적인 것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이 참된 힘과 원리가 아님을 알고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고니온으로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릅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45절에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바울을 반박하고 비방하였습니다. 기서 시기한다는 말은 부러워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 보다는 이방인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바울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종교적 특권의식이 훼손되고, 유대인의 독특한 문화와 종교적 관습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특권이 위협받게 되었다는 위기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스스로 구원의 길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쫓아냅니다. 동족을 아끼고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은헤를 나누려고 한 바나바와 바울이 다시 한 번 상심할만 일을 겪은 것입니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만들어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나바와 바울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헌신의 대가가 추방이었지만 그들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52절은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곳에 믿음의 형제들이 세워졌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며 말씀이 계속해서 승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다릅니다.
이고니온으로 향하는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 기쁨의 토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 마음은 결코이 세상 것에서 온전히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기쁨은 영원한 것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온전한 만족은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예배를 시작하면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읽어드렸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40장 6절, 8절)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고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영원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고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이고니온으로 떠나는 바나바와 바울은 기대하고 소망하였을 것입니다. 구브로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회심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얻은 복음의 열매가 이고니온에서도 맺힐 것을 꿈꾸며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인내의 역사는 또 이어져 갑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서기오 바울을 통하여 길을 여셨다고 믿고 배를 타고 갔던 버가에서 뜻하지않게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소망 가운데 들어갔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예상치 않게 동족들이 비방하고 시기하고 배척하는, 상실과 어려움 속에서도 바나바와 바울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어지고 확산되었습니다. 그 열매가 오늘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듯이 삶에 뜻하지 않은 상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이든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든, 혹은 소유와 건강에 위협을 당하는 일이든 바라지 않던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내부자라고 할 수 있는 요한이 돌아가버리듯 내 내면에 큰 허전함과 상처, 절망과 낙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헌신의 대가가 박해와 추방이었듯이 우리도 마음을 주고 시간을 내어 주고 정성을 다했는데 알아주기는커녕 듣지 않아야 할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고 특권을 누렸듯이, 마음에 들지 않고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성공하고 당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분하고 자존심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시고 영원한 영광의 자리로 부르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내를 기억하십시다. 그저 약해서 참고 계신 것이 아닌, 마침내 이룰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묵묵히 나가시는 하나님의 꾸준함을 기억하십시다. 마침내 뜻을 이루시고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마침내 왕으로 다스리실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면, 그 왕의 나라로 마음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왕의 법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바나바와 바울을 인도하셨듯이 우리를 지키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와 바울처럼 성령과 기쁨이 충만하여 이고니온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이고니온으로 소망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복음의 역사를 온전히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쓰임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