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꾸짖은 베드로(마태복음 16장 21-25절)
고창석 목사(키치너워터루드림교회)
올여름 캐나다 서부 지역에 유례없는 불볕더위가 있었습니다. ‘기후 위기’, ‘환경 위기’라는 말은 이제는 특정 분야에서만 쓰이지 않습니다. 일상용어가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 위기를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겪고 있는 나라가 몽골입니다. 몽골 정부 산하 사막화방지연구소에 따르면 몽골 국토 중 76.9%에서 사막화와 토지 황폐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몽골에 접한 고비사막은 매년 3,370㎢씩 넓어지고 있는데, 이는 서울 면적의 5배가 넘습니다. 몽골의 토지가 사막으로 변하는 원인은 지구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탓이기도 하지만, 캐시미어 염소 대량 유목이 또 다른 요인으로 지목됩니다. 1990년대 몽골 정부가 자본주의를 채택한 이후, 각 가정에 돈벌이가 되는 캐시미어 염소 목축을 장려했습니다. 캐시미어 염소를 키워 캐시미어 원자재를 팔아 돈을 버는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염소의 별명이 ‘잡초 제거꾼’입니다. 염소는 풀뿌리까지 먹기에 잡초 제거에는 아주 좋지만, 풀뿌리까지 먹기에 염소가 지나간 곳은, 특히나 몽골처럼 비가 많이 오지 않는 곳은, 더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이 염소 때문에 토지 황폐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캐시미어값이 치솟으면서 몽골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 더 많은 염소를 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몽골은 많은 염소를 키운 것이 자신들의 삶을 풍요의 자리가 아닌 절망의 자리로 이끌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사막화가 되면서 이제는 유목민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 와서 쓰레기를 뒤지며 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더 풍요로운 삶을 얻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것은 자신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잠깐의 풍요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깨달았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들이 살았던 푸른 초원은 사람도 그리고 염소도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게 시작한 일이지만 결과는 전혀 지혜롭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몽골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은 자신이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자신이 옳지 못하고 그르다는 것을 지금은 모르고 나중에야 깨닫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몽골 사람들은 많은 염소를 키우면서 푸른 초장이 사라지고 있지만, 사라지는 푸른 초장이 아닌 염소 털만 보였습니다. 캐시미어가 가져다주는 돈을 보다 보니 욕심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혹 보아도 무시합니다. 이렇게 욕심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오늘 말씀은 욕심이 생길 때 어떤 일까지 일어날 수 있는지 그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생긴 베드로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2제자 중에서 가장 열심을 가진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그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를 믿고 따랐던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죽임을 당한다는 말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멘붕 상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가족과 헤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는다니! 그것은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고 항변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려면 ‘항변하여’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항변’을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① 어떤 일을 부당하다고 여겨 따지거나 반대하는 뜻을 주장함, ② 어떤 일에 대하여 그 부당함을 따지고 반대 의견을 밝힘.” 국어사전에 나온 ‘항변’은 ‘반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죽음에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 ‘항변’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요? 예전에 우리가 보던 한글개역판에는 ‘간하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웃어른의 잘못을 고치도록 권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은 충신이 임금에게 좋은 쪽으로 권유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하지만 ‘항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는 계속 들어보시면 나옵니다. 바른 성경에서는 ‘항의했다’고 말씀합니다. 공동번역과 쉬운 성경은 ‘말렸다’ 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거칠게 소리 높였다’ 그리고 새번역에서는 ‘대들었다’고 번역합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NIV ‘rebuke him’, NRSV ‘rebuke him’, NASB ‘rebuke Him’, KJV ‘rebuke him’, GNT ‘rebuke him’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rebuke – 꾸짖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항변하여’의 동사는 ‘에피티마오’입니다. 이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30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피티마오’가 사용되는 말씀을 몇 군데 찾아보면, ‘에피티마오’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을 때(마 17:18), 예수께서 타신 배를 침몰시키려는 바람을 꾸짖으실 때(마 8:26),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을 제자들이 꾸짖을 때(마 19:13) 사용되었습니다. 나머지 경우도 거의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에피티마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꾸짖거나 예수께서 사탄을 꾸짖을 때 아니면 바람 같은 자연 현상을 다스릴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를 ‘에피티마오’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었습니다! 꾸짖었다는 것이 너무 심한 표현이라고 하면 최소한 강력 반발 정도는 가능합니다. 도저히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와 베드로, 단둘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제자들이 다 보고 있는데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스승인 예수께서 고난받는다고 했을 때, 제자인 베드로가 충정 어린 반대를 했다, 그래서 간했다고 이해하면 그것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원문대로라면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은 것이 분명하고 다른 제자들이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해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제자들을 바라보시고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꾸짖지 않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원문이 전하는 바는 베드로가 사탄의 도구가 되어 소중한 진리를 전하는 예수를 꾸짖었고, 예수께서는 베드로 배후의 사탄을 보시고 꾸지람으로 대응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사람이 어떨 때 꾸짖습니까? 사전에 나온 꾸짖다는 말의 예문을 보면 항상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이 문장이 먼저 나와 있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볼 때 잘못되었거나 건방을 떨면 꾸짖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항변하여’ 이 말은 지금 베드로는 자신이 윗사람이고, 예수를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옳기에 예수의 잘못된 말씀을 바로 잡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으면서도 예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결국 하나님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지 않았고, 예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덧붙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인 베드로가 하나님인 예수를 꾸짖고 가르치려고 했다는 것은 그때 베드로의 생각에 예수는 스승이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었다는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보다 못한 존재, 무지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자기보다 열등하고 무지한 존재로 판단하지 않았다면 꾸짖고 가르치려는 언동을 할 수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존재에게 꾸짖음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자기보다 많이 알고 현명한 사람을 꾸짖고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신만이 옳다고 여긴 것이 베드로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욕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생긴 순간 베드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어떤 욕심이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를 통해 자신이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를 따랐지만, 어느 순간부터 욕심이 생기면서 예수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싶었습니다. 이런 욕심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께 꾸짖는 일을 합니다. 베드로처럼 욕심의 사람이 되면,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실은 예수를 통해 자신이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잘되지 않으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녀도 소용이 없다고 하거나 자신이 교회와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이 예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현재 욕심을 채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몽골 사람들이 염소를 더 많이 키우고자 하는 욕심으로 인해 이들의 삶이 잠깐은 좋아졌지만, 지금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사람은 어리석기에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좋은지 모릅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우리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합니다. 자신이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믿는 모습입니다.
욕심으로 인해 예수를 꾸짖는 베드로는 예수보다 자신을 더 믿고,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23절). 예수께서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꾸짖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자, 여기에서 사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사탄은 머리에 뿔이 달려 있고, 입에 피를 묻히고 있거나, 괴상망측하게 생긴 존재가 아닙니다. 사탄은 욕심으로 가득하여서 예수를 믿는 척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보면 얼마든지 나도 사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우면,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 뿐입니다.
하지만 스승은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25절입니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께서는 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옳다는 욕심을 버려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와의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방해 요소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입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적 조건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나, 우리 자신이 가장 큰 방해 요소입니다. ‘이기적인 나, 교만한 나, 욕심이 많은 나,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을 더 사모하는 나’입니다. 예수보다 많이 잘났다고 하는 ‘나’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욕심 덩어리들이 깨어져야만 우리는 예수와 깊은 만남의 세계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욕심, 내 생각, 내 자존심을 깨는 것, 이런 것을 가리켜서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욕심이 솟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작업을 해야만 합니다.
흉측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서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 사탄이 아닙니다. 아주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편한 길로, 쉬운 길로 인도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그랬습니다. “힘들게 하나님 말씀을 지킬 필요가 뭐 있냐? 선악과 한 번만 따 먹으면 하나님같이 되는데”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계실 때도 사탄이 말했습니다. “뭐 힘들게 금식해.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믿고 따라올 텐데.” “저 성전 꼭대기에서 한 번만 뛰어내려 봐. 그러면 다 존경하고 추종할 텐데.” 이처럼 사탄은 항상 쉬운 길, 편한 길, 달콤한 길을 가도록 유혹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뭘 그렇게 힘들게 신앙 생활해?” “기도해야 하고 헌금해야 한다면서?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살아? 너의 장래를 위해서 투자하고 저축하고 준비해야 해.” “결혼은 어떻게 할래? “애들은 어떻게 키울래? “건강도 생각해야지.” 한사코 우리에게 불신을 심고 두려움을 심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안으로 오그라들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 없는 성공, 고생 없는 안락함, 헌신 없는 즐거움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고난 없이 영광에 이른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작업 없이 건강한 성공에 이른 사람이 있습니까? 피땀 흘리지 않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니엘을 보면, 그는 포로 생활 초기부터 고난이었습니다. 아니 고난을 자처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채식만 했습니다. 사자 밥이 될 각오를 하고 하루 세 번 문을 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목숨을 걸고 자기 부인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자의 입에서 살아나게 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이미 예수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잘 참고 다녔을 때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자기 부인 없이 부활의 영광에 이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즉 내 생각, 내 욕심을 내려놓고 그 길을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는 말씀은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이 목숨을 버리는 것처럼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사람은 삽니다. 왜냐하면 말씀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사람만이 본질을 볼 수 있고 그러하기에 생명이신 예수를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혹시 몽골 사람들이 그랬듯이, 베드로가 그랬듯이 내가 옳다는 생각 그리고 욕심에 이끌려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생명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릴 사망의 자리에 이를 뿐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스스로 옳다는 생각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름이 지금 보기에는 손해가 나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참 생명의 길입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많이 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얼마나 스스로 부인하고 살며, 내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이런 신자는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버림이 오히려 사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길로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