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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썰물의 시간에 붙들어야 할 것(시 43:1-5)  

썰물의 시간에 붙들어야 할 것(시 43:1-5)  

캘거리 하늘가족교회 이기형 목사 

썰물의 시간에

바닷가 뿐 아니라 인생에도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내가 크게 힘쓰지 않아도 나에게 밀려 들어올 때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붙들어도 허망하게 빠져 나갈 때가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두 날을 병행하게 하셨다는 것이지요(전 7:14). 

밀물의 시간은 해피 타임입니다. 제 발로 들어오는 듯 싶으니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늘 이런 시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썰물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썰물의 시간은 한계상황에 부딪친거 같은, 자신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는 시간입니다. 사람도 나가도 물질도 나가면서 함께 용기도 자신감도 빠져 나갑니다. 그리고 우울과 불안이 밀물처럼 몰려 옵니다. 

“이젠 못해 먹겠다, 때려 치든지 해야지”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기 쉬운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곤란 중에 위로가 되시고 우리를 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119:50). 혹시 여러분 중에도 썰물의 시간을 경험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충전과 회복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시인의 썰물

1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시 43;1)” 

우리는 1절 말씀의 시인의 간구를 보면 시인이 어떤 어려운 문제를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공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판결을 부탁합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판결해 주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잖습니까? 그런데  감히 하나님께 판단해 달라고 할만큼 시인은 의롭다는 것일까요? 그만큼 자신있다는 것일까요?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억울하고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감찰하시고 결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손해 당하지 않도록 정확하게 판결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셨으면 나의 변호인이 되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유능한 변호사는 피해자를 잘 살펴서 억울함이 없도록 변호해 주는데 하나님께서 그 변호사가 주십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 내용은 나와 있지 않고 어려움을 주는 상대방이 나오는데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의 상대는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들입니다. 한 개인이나 무리가 아니라 공권력을 국가가 시인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형편이라면 누구라도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2. 시인의 탄식

그래서 시인은 탄식합니다. 2절 말씀에는 시인의 탄식이 나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시편 43:2)” 여기 두 번의 ‘어찌하여’라는 의문문으로 강조되는데, 하나님께 대한  탄식과 자신에 대한 탄식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을까? 

먼저 하나님께 대한 탄식은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앞서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약자의 재판장이 되어 주시고 의로운 자의 변호인이 되어 주시길 간구하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인은 그런 줄 알았는데, 힘이 되어 주실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거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 버렸다는 말은 굉장히 강한 표현인데, 강한 혐오감 내지는 역겨움을 반영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신약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입에서 토해 내겠다고 하셨는데 여기 ‘토해내다’가 이 단어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가장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셨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입니다.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고 보호와 피난처가 되시겠다 하셨는데, 시인을 버리지 않고서야 이런 어려움을 겪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약속은 당신의 이름에 담아 주셨는데,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마 1:23).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실 것이니 강하고 담대하라 하셨습니다(수 1:9).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마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처지를 보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전혀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으니 배신감은 크고 더욱 상처가 되고 아픔이 크게 다가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때때로 이런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날 잊으신 것은 아닌지, 날 버리신 것은 아닌지…  언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부요함을 누리는데 나는 하루 하루가 고달프고 힘들기만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살아 계시고 나의 판단자이며 변호인이고 힘이시며 구원이시라면 어떻게 내 삶이 이다지도 참담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슬프게 다닐까? 

시인은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탄식하는데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탄식합니다. 여기 ‘슬프게’라는 단어는 탁류처럼 ‘흙탕물이 된’, ‘더럽고 먼지가 낀듯한’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슬픈 감정을 넘어 굉장히 어둡고, 슬프고, 처량한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 담대한 믿음은 어디가고 이렇게 어둡고 처량하게 코가 빠져 있나.. 시인은 자신을 보아도 한심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심경을 5절에서는 두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낙심과 불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시 43:5)”  

낙심과 불안은 상반된 그림을 그려 주는데, 낙심은 슬픔의 무게로 인해 가라앉은 심히 우울한 상태를 그려주는가 하면, 불안은 소리를 내며 솟아오르거나 가라앉는 바다의 파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성난 파도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요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감정도 때로는 깊은 좌절 가운데 짓눌리기도 하고, 사나운 풍랑으로 인해 요동치는 것처럼 격동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향한 자책과 외부를 향한 분노가 끊임없이 시인을 괴롭힙니다. 

3. 시인의 회복 

시인은 하나님께서 날 버리셨다고 탄식하며 낙심과 불안 가운데 마냥 머물고 있습니까?  낙심과 불안은 어떤 일에 반응하는 감정입니다.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만,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일에도 불안하지 않고 낙심되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감정이 고장난 것입니다. 

우리는 불안과 낙심을 죄로 여기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여기지만 그렇지만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불안과 낙심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불안과 낙심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가야할 곳을 알려주는 이정표입니다. 불안과 낙심에 사로잡혀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불안과 낙심을 통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시인은 불안과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거 같다고 탄식하지만 그럼에도 거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 첫 걸음은 낙심하고 불안해 하는 자기 영혼을 향해 어찌하여 낙심하고 어찌하여 불안해 하는지 도전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시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2절에서는 ‘어찌하여’를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탄식으로 사용하였던 시인은 이제 여기서는 ‘어찌하여’를 자신의 영혼의 믿음을 일깨우는 의문으로 사용합니다. 어쩔 수 없다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러냐고 따져 묻는 것이지요. 

그렇게 따져 물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상황이나 환경보다 하나님께서 더욱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선포합니다. 세상이 소망을 둔들 무너질 수 밖에 없고 자신에게 소망을 둔들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산 소망(LIVING HOPE)이 되십니다.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찬양을 소개합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깊은 절망의 수렁 가운데 주님께 닿을 수 없던 우리, 어둔 밤 중에 하늘을 향해 주의 이름 나 부를 때, 어둠을 뚫고 오신 주 사랑 나의 절망 거두셨네, 주님의 공로 다 이루셨네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깊은 절망에 탄식하신다면 이 찬양이 여러분을 소망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

하나님께 소망을 둔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합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시인은 스스로는 낙심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으니 하나님께서 빛과 진리를 보내셔서 자기를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찬송가 375장은 우리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그래서 인생들은 방황합니다. 

하나님의 빛과 진리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어둠의 세력을 쫓아내고 밝은 소망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디로 인도해 달라는 것일까요? 여기 본문에는 주의 거룩한 산, 주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거룩한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 뵙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이제 환경을 통해 굴절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나의 삶이 형통할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삶이 막히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인식은 이기적인 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내가 죄악의 길로 나아갈 때 제지를 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증거가 되겠지요.   

시인은 과거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어두움에 가려있는 그의 길을 빛으로 비추어 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제단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주께서 빛과 진리로 거룩한 성전에 인도해 주시기만 하면,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겠다고 고백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하나님께서 주의 전에 이끌어 주셨으면 이제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는 것은 시인의 의지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제단은 시은소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곳, 새 힘을 공급해주는 능력의 산실입니다. 그것을 잘 표현한 찬송가가 247장 “이 세상 풍파 심하고 또 환난 질고 많으나 나 편히 쉬게 될 곳은 주 예비하신 시은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기에 지금 우리가 여기 예배당에 있습니다. 예배당에까지 이끌어 주셨는데도 정작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 못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습관적인 예배로 교회당 문턱을 드나든다면 수박 겉 핥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제단 시은소에까지 나아가십시오. 거기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시 73:16-17). 하나님을 귀로 듣는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대면하시는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절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예배자의 찬송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시인은 탄식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셨고 버리셨다’고 절규하지만, 이제 성전의 시은소에 나아갈 때 그의 고백은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이렇게 바뀝니다. 그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이 시인의 찬송이 또한 우리의 찬송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무리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썰물의 시간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자신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떠나셨다고 생각되며 슬픔과 낙심으로 불안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산에 장막에 그리고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 하나님만 소망할 때 그는 다시금 기쁨과 찬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이제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숨어 지내시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 자기를 도우시기에 이제 어떤 상황과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문제의 해결자이신 주님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탄식에서 찬송으로 나아갈줄 믿습니다. 그렇다고 본 시편에는 시인의 상황에 진전되었거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바뀌었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처음 불안과 탄식에서 시작했지만 기쁨과 찬양으로 마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만 바라볼 때 그의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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