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의 영광_마태복음 16장 24절
밴쿠버지구촌교회 김봉수 목사
남녀가 서로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게 되면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 사랑이 자라 꽃을 피우게 되면, 가정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랑을 가꾸는 가정은 위로, 소망, 기쁨, 감사, 행복을 나누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이 맺는 열매와 영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오고 가는 사랑 고백을 통해 누리게 되는 성도의 영광, 곧 교회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도의 삶 속에 드러내는 영광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사랑 고백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사랑 고백을 보고 들으신 하나님은 이삭 대신 ‘번제’로 드릴 숫양을 제공하시며,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도의 사랑 고백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 곧 교회의 영광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리고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영광은 무엇입니까? 엡1장 22절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은 교회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가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도가 섬기고 봉사하는 이유도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나누고 큐티 모임을 하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즉, 교회의 모든 예배와 사역과 섬김과 봉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숫자와 건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능력과 경험과 지식으로 증명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생명과 은혜입니다.
오늘 읽은 24절 말씀 앞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어 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제자들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 어떤 이들은 엘리야,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게 하신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이 고백 위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고백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가 약속되어 있으니 얼마나 건강한 교회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고백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런 교회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일지라도 교회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대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제가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온전한 신앙 고백을 하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믿음의 능력을 가졌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영광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사탄아!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 지게 하는 자로다”. 주님이 “사탄아 뒤로 물러 가라” 말씀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십자가와 부활 곧 예수가 교회의 영광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올바른 고백과 지식이 넘치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능력이 있을지라도, 영광을 잃어 버리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자랑 되고, 높임 받으시며, 오직 예수님만 성도들의 심령 안에 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유능한 목회자가 성도의 마음에 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생명이 남는 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있습니까? 24절입니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 하셨을까요? 베드로는 신앙 고백도 올바르고,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 고백과 능력을 소유할지라도, 십자가와 부활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죄 된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건입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죄 된 본성을 거부하는 ‘삶’이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삶”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영광이 되도록,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죄 된 본성을 거부하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성도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영광이 됩니다.
먼저,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죄 된 본성을 거부하기 위해, 요청되는 자기 부인은 성도가 지금까지 주님께 드렸던 ‘충성’과 ‘헌신’을 기념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명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저도 가나안 땅에 들어 가면 안됩니까?” 물어 보았더니, “넌 안돼 다시는 이 일로 내게 기도하지 말라”고 아주 못을 박으셨습니다. 이 거절은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주님의 명령을 모세가 어기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낸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우리 하나님 너무 한 것 아닙니까? 모세가 40년 동안 수고한 것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인자와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단 한 번의 불순종을 꼬투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와 같이 충성스런 사람은 없었다(민12:7)”고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10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역사에 사용되었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고, 아말렉과 요단 동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만일, 모세가 살아서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 갔다면,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리더쉽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찾았을 것입니다. 모세의 충성과 헌신과 영광을 가지고 들어 가는 한, 교회는 하나 되지 못합니다.
만일, 모세의 충성과 헌신과 영광에 이스라엘이 사로 잡혀, 공동체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그의 충성과 헌신이 오히려 교회를 어렵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충성과 헌신은 하나님의 마음과 역사 속에 기념하시고, 이스라엘이 여호수아 중심으로 나갈 수 있도록,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건너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즉, 사람의 충성과 헌신과 영광이 기념 되는 공동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성하고 헌신하는 자들의 영광을 사람의 가슴에 새기지 말고, 하나님의 가슴에 새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자기 부인’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헌신하고 충성하는 귀한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사람의 가슴에 새겨 지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이렇게 자기 부인이 있는 성도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이 되십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부인을 할 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옳음 보다 생명을 구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고, 성장 할 때, 반드시 질서가 필요 합니다. 질서와 선을 넘어 가면 교회가 힘들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질서를 지키되 자기의 옳음 보다 생명을 구하는 교회가 될 때, 예수께서 교회의 영광으로 나타나십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나옵니다. 두 명의 여인이 각각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어미에게 깔려 죽습니다. 자신의 아이는 죽었는데 동료의 아이는 살아 있는 것이 시기가 나서, 그 아이를 데려와 자기의 아이라고 우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앞에 가서 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으로 인해, 진짜 어미를 분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말을 합니다. “아이를 반을 갈라 나누어 주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의 진짜 어미는 자신의 말을 바꾸어 “아이를 자신에게 주지 않아도 좋으니, 저 여인에게 주라”고 말을 합니다.
이 여인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으로 서 있는 왕 앞에서 “저 여인에게 아이를 주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이 거짓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엄마는 자기의 옳음 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붙들었습니다.
그러자 이 때 거짓말을 하던 여인은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누구의 것도 되지 않게 하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솔로몬은 진짜 어미에게 “아이를 주라고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진짜 교회는 자기의 옳음 보다, 생명을 살리는 모습을 소유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교회의 영광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가짜 교회는 자기의 옳음, 곧 자기의 영광을 증명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냅니다. 무엇입니까?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될 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영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공동체 안에는 신앙의 배경과 지식이 다른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 또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많은 경우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옳음은 증명 되었을지 몰라도, 생명은 살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옳음이 인정 받지 못하고, 틀렸다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생명을 살리는 것을 선택하는 곳에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