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랑은 무엇입니까?(고후 12:2-9)
갈보리한인장로교회 박대호 목사
여러분 이력서 써보셨나요? 제가 우리 교회 목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저도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써 보았습니다. 아시겠지만, 목사가 되기전까지 제가 좀 많은 일을 해 보았습니까? 한때 제가 직업을 동시에 6개나 가졌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 참 많은 이력서를 써서 돌려 봤습니다. 이력서 써 보신분들 아시겠지만, 어떤 직장들은 자기 소개서, 자소서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력서와 자소서에 무슨 내용을 담으시겠습니까?
이력서나 자소서(자기 소개서) 작성 요령에 대해 인터넷에 보니, 친절히 설명하고 있는 많은 싸이트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자소서와 이력서 작성 요령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주안점을 두고 고려해야 할 것에 대해 자신의 능력이나 장점이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사항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문서로만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받은 자가 일목요연하게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이력서와 자소서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거짓을 사용하지 않는 부분에서 자신이 돋보이게 하는 것이 이력서이고 자소서 일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력서와 자소서는 자기 자랑의 글이 되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사람들에 의해 사도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사도들과 성도들에 의해 사도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들의 권위에 딴지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교회들로부터 이력서를 요구받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가 사도로 부름을 받고 주님의 일꾼으로 열심을 다해 전도여행을 하며, 주님을 전파했지만, 항상 그를 의심하는 세력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런 의심을 알고 고민하면서 편지를 보낼 때마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증명하려기 보다는 복음이 가려지지 않게 노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고린도 후서에서도 이러한 노력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자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이력서를 써 놓은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는 거죠. 고린도 후서를 읽고 있으면 사도 바울도 “내가 자랑하노니” 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랑을 늘어 놓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무슨 사도가 겸손하지 못하게 자기 자랑을 늘어 놓는냐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유교의 영향으로 자신을 자랑할 것을 감추는게 미덕이라 여기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자기의 자랑할 것을 자랑하는 것은 일반적인 문화였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 당시 지식인들이나 고위 관리들은 전부 다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해서 언제든지 빼먹지 않고 알리기 위해 자신이 성취한 목록을 적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너를 소개해 봐라. 하면, 꺼내서 자신의 연역을 빼먹지 않고 나열한 거죠. 이렇듯 이것이 일반적 문화였음을 감안하고 보십시오. 그런 문화 가운데서 사도 바울에 대해 교회가 의심하자 사도 바울도 자신의 성취한 목록을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후 11:18 절에 보면, 그가 자랑하는 내용이 시작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다른 이들 처럼 자신도 이제 자랑하겠다는 거죠.
여러분이 바울이 되어서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자랑하려면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나의 업적, 내가 이런 교회를 개척했고, 내가 기도했더니, 병이 고쳐지고 귀신이 쫓겨나며, 망해가던 사업이 번창하고, 부가 임하더라. 등.. 좋은 점만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죠. 그럼 사도 바울도 그러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 본문 앞부분에서 바울의 자랑을 읽어 봅시다. [고후 11:18-33]
지금 바울이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보세요. 이게 자랑인가요? 솔직하게 이야기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본 우리라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그의 모습과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지는 바울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
그리스도를 위해 저렇게 모든 것을 걸었구나 하면서 칭찬하며 이것은 자랑이 맞다 하겠지만,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나의 반대파, 나의 약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이 본다면 어떠할까요?
세상사람들은 왜 그런 수고까지도 감당할까? 참 이해 못할 사람이다. 참으로 어리석다 할 것이고, 예수를 믿더라도 그의 반대파들은 이런 이야기에 “거봐라!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도라 할 수 있냐?”라며 약점을 잡고 기쁜 마음으로 공격할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바울은 자살골을 넣고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능력의 사람이라면 하는 일마다 잘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 가는 길마다 형통해야한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자랑하는 것들을 보면 무슨 이야기에요.
“내가 예수 믿고 이만큼 고난 당했었다”이런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현대의 교회 가운데서도, 또 성도들 가운데서도 바울의 이 자랑을 성경을 읽으며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이해 못할 사람도 꽤 될것입니다.
‘아니 예수를 믿으면 잘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 예수를 믿었는데, 위험이 있고, 고생이 있고, 고난이 있고, 핍박을 당하며, 희생과 아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하면서 혀를 찰지 모릅니다.
32절로 33절은 그 당시 모든 사람에게 이해가 어려운 자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 앞에 맹세하면서까지 꺼내놓은 자랑거리는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간 사건이었는데 당황스럽게도 이는 그 시절의 남성이라면 어떻게든 지우고 싶은 치욕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로마에서 각 영웅들에게 수여하는 관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로마에서는 영웅이 추앙 받았고, 그들에게 수여되는 관을 받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요. 그 사람에게는 가장 큰 자랑이 되었습니다.
당대의 모든 부모들은 제 자식이 그러한 영광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지금 바울이 자랑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이게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성에 목숨을 걸고 첫 발을 내딛기는 커녕 성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있는 겁니다.
이걸 자랑이라고, 올라가는 것으로도 시원찮을 판에 그는 거꾸로 내려가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고 있으니, 고린도 교인들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가 없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톰 라이트가 자신의 주석서에서 밝혔듯이 바울은 ‘코로나 무랄리스’의 신화를 거꾸로 뒤집어 엎는 이야기를 하여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는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사람으로 지금 보여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11장을 마무리한 바울이 오늘 본문인 12장으로 오면서,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 것이 하나 있다. 잘 들어 봐라. (12:1)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제야 제대로된 바울의 이력을 들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안다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면, 14년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자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셋째 하늘이 뭔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어 이것도 잠시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세개의 하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이고, 둘째는 우주의 별들이 깃들인 하늘이 있다고 믿었고,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개념이 지금까지도 있는 분들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예비한 새 예루살렘이 저 멀리 우주로부터 지구로 오고 있다고 허블 만원경에 그 도시가 잡혔다면서 소란을 떠는 분들 있는데, 여기에서 한마디 더 드리자면 저는 여러분이 물리적인 공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을 이해하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도 눅17:20-21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천국은 어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 보죠. 그 어떤 사람, 삼층천에 올라간 그 사람은 그 낙원에 올라가 절대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할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바울이 3인칭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좀더 자신의 사실을 객관화하고, 교회를 위해 자신의 개인적 중요성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 3인칭으로 표현한 것 뿐이었습니다.
이제 보니 어떤가요? 사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랑할 것이 있는 누구보다도 영적 체험을 많이 한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처음부터 이 말을 할 것이지, 예수 믿고 고난당하고 창피한 일만을 자랑이라고 했나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분명 바울은 역시 한방이 있는 사람이었어.’ ‘봐. 삼층천까지 다녀왔던 자이잖아.’ 하고선 집중하며 그가 들은 말을 궁금해 하며, 또 그 곳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글을 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또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본문 5절을 우리 같이 볼까요.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바울은 지금 그런 영적 체험에 관한 것은 자랑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선 무엇을 자랑한다고 고백합니까?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10절을 또 같이 읽어 볼까요.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참 희한한 사람입니다. 놀라운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그대로 자랑해도 될 텐데. 굳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상대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약함이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약점을 찾으러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할 만한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은 진정으로 구원을 경험했기에 이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한 것이 자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이 신비이거든요. 사실, 우리들의 본질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은 지극히 연약하고 제한적인 것인 존재아닙니까?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는 절대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지금 세상의 지식이나 지혜가 놀라운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실생활에 쓰이는 기술들을 보면, 정말 예전에는 상상 속에서나 등장하는 기술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생물학에서는 사람이 늙고 있는 이유, 노화 인자를 발견해서 이제 그것을 제어함으로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또 생물을 복제해 내고 있는 처지에까지 놓였습니다. 날씨를 제어하기도 하고, 바다를 개간하여 땅으로 만드는 기술을 인류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영역을 넘은 것처럼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어떤가요? 사실은 다 하나님의 발 밑에 있을 뿐 아닙니까! 우리는 한계가 언제나 존재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한계가 없으십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자랑은 하나님 앞에 서면 전혀 자랑할 것이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바울은 너무도 잘 알기에 그가 하는 자랑은 약한 것일 뿐인 겁니다. 왜냐? 그 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동행으로 세상이 가질 수 없는 한계 없는 능력, 반전의 능력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하나 우리 하나님은 강하셔서 우리의 약함을 완전히 가려 버리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 약함 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참된 자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머리에서 하늘까지 하나님의 축복이 쌓여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자는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약함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니 우리의 약함이 자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여러분 제가 갈보리 교회를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 교회가 밴쿠버 안에서 큰 교회도 아니고 자립하여 운영할 수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주변에서 볼 때 매우 작고, 연약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밴쿠버 안에서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이런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은 더 크게 드러나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찬양 받게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강함을 숭배하는 문화에 자신의 약함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드렸지만, 그가 구원의 은혜를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심’ 을 보았기 때문에 바울도 마찬가지로 그는 연약한 자신의 몸과 마음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강해짐을 알았던 것입니다.
내 능력, 내 힘, 자랑해봐야 한계에 부딪히고, 내 능력, 내 힘으로 주님의 일을 해 봐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한계만을 느끼게 될 뿐입니다. 내가 뭔가 잘한다고 내가 이뤘다고 자랑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자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하면 약할수록 그 위에 임하시는 주의 능력은 더욱 크게 나타나기에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랑은 나의 장점과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 때문에 그 위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축복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가 보통 자랑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재물, 명예, 권력, 지식, 출세 등 그 모든 것이 결국 순간적인 것들일 뿐이며 인간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없는 무익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자랑에 매달리게 될 때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게 되고 허무감만을 느끼며 부족함에 빠져 허덕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 경쟁에서 이기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며, 병이나 문제가 해결되어야 축복을 받아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자랑을 지금 하고 있음을 우리 잊지 마십시오.
이제 끝으로 7절로 9절에 바울의 자랑이 우리에게도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인지 나누며 마무리합시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축복을 받은 게 아니라. 저주를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그것을 위해 세번이나 주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침묵하십니다. 바울은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의 생각을 우리는 쉽게 가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간절히 원하지 않아서 라고, 우리가 병고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지금 그 육체의 가시가 사라지지 않은 걸까요? 아닙니다. 세번 간구하였다는 것은 완전수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께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습니까? 바울에게 있어 가시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가시의 상황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가시가 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들의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결국 바울은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알고, 주님만을 보배임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연약함이 그대로 일진데 그 연약함을 덮는 더 큰 은혜로 인해 그것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세상의 것으로 자랑삼아 살고 계십니까? 그런 상대적 자랑은 절대적인 자랑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일시적이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진짜 우리가 자랑할 것은 바로 우리의 약함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약함이 확실히 인정될 때 주님의 능력과 축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없음을 알고 부득불 자랑을 해야 한다면, 그리도 부족한 우리를 구원의 은혜로 덮으신 우리 주님만을 자랑하며 주를 찬양하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