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함을 나타나셨더라._민수기 20:7~13
새문안교회 김민우 목사
[가데스 바네아]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소 하나쯤은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경험했거나, 충격적인 일을 당했던 장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 바네아’라는 장소를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2년 정도 지났을 무렵에 가네스 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약속의 땅 가나안 목전에 있는 곳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가서 정복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래도 모르니까 먼저 선발대를 보내서 그 땅을 살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차출해서 12명의 선발대를 보냈습니다.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하는데,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건 맞지만, 아낙이라는 장대한 부족이 살고 있어서 우리가 정복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애굽에서 죽게 내버려두지 왜 광야에서 죽게 만드는가.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크게 실망하시고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너희 중 스무 살 이상은 결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원망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머릿속에 가네스 바네아는 ‘원망 때문에 심판을 받은 장소’로 각인되었습니다.
[다시 가네스 바네아로]
그 후로 38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때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38년 동안 광야를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이 또다시 가네스 바네아였습니다. 그동안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거의 다 죽었고, 가네스 바네아에 도착하자마자 모세의 누이 미리암마저 죽었습니다. 미리암의 죽음은 출애굽 1세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38년 전에 스무 살 미만이었던 청년들이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가데스 바네아에 섰습니다. 그리고 멀리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테스트를 받습니다. 그들은 부모 세대로부터, ‘원망은 참혹한 심판을 가져온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38년 동안 광야에서 혹독하게 훈련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부모 세대와는 분명 달라야 합니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말처럼 뭔가 나아진 면이 있어야 합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38년 전 부모 세대의 원망을 들어보십시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그리고 자녀 세대의 원망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어떻습니까? 38년의 간격이 있지만, 너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녀 세대는 여기서 한술 더 뜹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아니 누가 씨를 뿌리라고 했습니까? 무화과나 포도나 석류를 재배하라고 했습니까? 지금까지 수고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입혀 주셨습니다. 그런데 원망에 원망이 더해지니까 이렇게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고, 은혜 베풀어 주신 분을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들먹이면서 하나님을 나쁜 분으로 몰아붙였던 겁니다. 그리고 파종하고 재배하는 일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할 일입니다. 원망은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까지도 미리 염려하게 만듭니다. 아쉽게도 자녀 세대는 38년 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부모 세대를 광야에 묻을 때마다, 원망하면 심판받는다는 교훈을 되새겼지만, 정작 비슷한 상황에서 부모의 허물을 따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죄악의 뿌리는 참으로 질기고 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대가 거듭되어도, 훈련을 많이 받아도, 죄악을 뿌리 뽑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저도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자녀가 저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자녀의 태도에서 지적할 일이 종종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건 좀 고쳐야 하지 않니? 라고 하면 대뜸 이런 반응이 돌아옵니다. ‘아빠도 그러잖아.’ 그 순간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어디서 배웠겠습니까? 저에게서 배웠겠지요. 그래서 내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매번 하게 됩니다.
[모세의 실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다 하더라도 모세는 어땠을까요? 모세는 백성들이 원망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두 번의 가데스 바네아 방문 모두 물 부족 현상이 있었습니다. 38년 전에는 반석을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38년 지난 지금은 하나님이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면,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에는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었고, 지금은 말씀을 선포하여 물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쳤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모세는 익숙한 대로 행동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면밀하게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따라 간편하게 행동했던 겁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제의 영성으로 오늘을 살 수 없고, 어제의 말씀으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날마다 새로운 말씀을 들어야 한다.’ 모세는 이 점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모세가 분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지팡이로 두 번 내리친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모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감정을 잘 절제해 왔습니다. 하나님도 모세를 칭찬하시길, 너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40년을 잘 버텨왔는데,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 화를 쏟고 말았습니다. 그 화는 하나님과 백성 모두를 향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합니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백성을 향해서는 ‘내가 당신들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이냐? 나를 제발 내버려둬.’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모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자로 서는 건 매우 고달픈 일입니다.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쌍한 모세를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모세의 잘못은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겁니다. 누구 앞에서요?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단순히 화를 낸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던 게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사소한 실수 아니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매우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결국 이 실수 하나 때문에,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소망은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이었습니다. 40년 동안 이것 하나 바라보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을 강제로 멈추신 겁니다. 모세 입장에서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지요.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참 가혹하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토록 문제 삼으셨던 ‘거룩함’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하나님께 적용한다면, 하나님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견줄 수 없는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특히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자 그렇다면 모세가 나타내야 했던 하나님의 거룩함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다고 불평할 때, 있지도 않은 일까지 들먹이면서 원망할 때, 다른 신들 같았으면 바로 진노를 쏟아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로우셨습니다. 원망 가득한 기도도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별됨이고, 거룩함입니다. 모세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운 얼굴 대신, 분노 가득한 얼굴로 백성 앞에 섰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보았을 때 무엇이 연상되었을까요? 진노가 가득한, 그래서 당장이라도 심판할 것 같은 하나님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모세는 그 순간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제가 신대원 1학년 때 작은 교회에서 전도사 일을 하는데, 한 번은 장마철에 홍수가 나서 지하 성전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교인들이 총동원되어서 물을 퍼내고 말려서 장판을 새로 까는 작업을 했습니다. 장판이 두루마리로 말려 있어서 무릎을 꿇고 밀어서 깔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무릎 꿇을 기력이 없어서 발로 툭툭 밀어서 깔았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엄청나게 야단을 치시는 겁니다. 지금 교인들이 다 보고 있는데, 목회자가 그렇게 불량한 태도를 보이면 되냐고 말입니다. 저는 굉장히 서운하고 억울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딱 한 번 발로 쳐서 밀었는데, 그걸 문제 삼으시다니.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서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작은 행동 하나에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담아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경험을 떠올릴 때마다 말과 행동을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모세는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 서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모세나 목회자에게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살아갑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다.’ 부모의 역할 중에는 자녀를 낳고 기르는 일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부모의 모습을 통해 배웁니다. 부모의 말과 행동 그리고 뒷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에 그려 나갑니다. 그런데 만약 자녀의 생각 속에 우리 아버지는 무섭고, 잔소리 많고, 술주정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도 똑같은 분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청소년 사역할 때 아이들로부터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라면 나는 믿지 않을 거예요. 실제로 어떤 아이는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많아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매우 힘들어하는 경우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아버지가 방에 있으면 자녀들이 거실에 옹기종기 모이고, 아버지가 거실에 나오면 자녀들이 각자 방으로 들어간다. 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입니다. 앞서 부모 세대로부터 이어진 원망의 뿌리가 자녀 세대로까지 뻗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대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십시오. 그것이 부모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구약성서 아모서 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더 이상 너희의 절기와 예배를 받지 않겠다, 제물도 싫고 찬송도 부르지 마라. 왜 그만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을 섬길 때, 가나안의 신을 숭배하는 것처럼 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신들은 사람들이 갖다 바치면 그것에 감동해서 복을 내려주는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오해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가나안의 신들과 다르다. 나는 너희가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에 감동하는 신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의는 불의한 권력에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빼앗긴 자에게는 도로 찾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공의를 부르짖는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다들 경배받으려고 안달이 나 있는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를 예배하지 말고, 그 힘으로 세상의 공의를 위해 힘쓰라, 그것이 곧 나를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이 성전에 모여서 예배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열정 이상으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거룩함을 드러내시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습니다. 원망의 결과로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두 번째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이유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난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서 소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40년이나 광야 훈련을 받았어도 실패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수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13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모세가 나타내지 못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당신께서 직접 나타내셨습니다. 그 결과, 물이 많이 나와서 백성들과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풍족하게 마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인간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구원하셨다는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례가 수없이 많습니다. 탕자가 집을 떠나 방탕하게 살아도 끝까지 기다렸다가 품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하는데, 몸을 구부려 품어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실의에 빠져서 세상과 담쌓고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새 능력을 불어넣으신 성령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죄인이지만, 그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누가 이런 방식으로 죄인을 구원할 뜻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어떤 신이, 어떤 종교가 자기를 희생하는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보석 가게를 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금은 때리고 단련할수록 순금에 가까워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순도의 한계치가 99.99%라는 겁니다. 무슨 수를 써도 아무리 0.01%의 불순물은 제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인간의 노력으로 99.99%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거기까지 가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설사 99.99%까지 간다고 할지라도 0.01%가 부족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의 의로움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0.01%의 한계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도다.’ 이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모세도 실패하고, 이스라엘 백성도 실패했지만, 하나님이 거룩함을 나타내신 덕분에 구원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결론]
가데스 바네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실패를 은혜로 바꾸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골고다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수치와 부끄러움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응시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져가시고 대신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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