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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사랑은 허물을 덮습니다 Love Covers Our Weaknesses_창세기 9장 20-27절_주임재교회 김은철 목사

사랑은 허물을 덮습니다 Love Covers Our Weaknesses_창세기 9장 20-27절

주임재교회 김은철 목사

한국 사람들은 정보에 민감한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 시대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정보가 없으면 가족과 자신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정보를 빨리 알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원이 하나도 없는 한국이 다른 나라와 경쟁에서 이기려면 정보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정보에 민감합니다. 

이러한 습성으로 인해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주식, 부동산, 가상화폐 등등 각 종목 마다 오픈 채팅방이나 텔레그램 방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고급 정보를 아는 방들은 대부분 유료로 운영을 하는데 사람들이 큰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회원으로 가입한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정보를 알아 투자하여 큰 돈을 벌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세계에서 한국만 가지고 있는 문화일 텐데 입시 컨설턴트가 따로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외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학별 정보를 바탕으로 학생들의 대학 입시를 상담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유명 입시 컨설턴트들은 한해 수입만 수십억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저는 정보를 빨리 아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비즈니스를 운영하시는 분들이라면 정보를 빨리 알아야 회사를 잘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소규모 자산을 투자하시는 경우에도 정보를 빨리 안다면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활동 측면이 아니라 인간관계 측면에서는 정보를 빨리 아는 것은 여러 면에서 별로 좋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면 소문이라는 것이 보통 좋지 못한 이야기 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소문을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소문을 알리지 않고 자신만 안다고 할지라도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소문의 당사자를 만나게 될 때 선입견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 인간관계의 경우 정보를 빨리 아는 것은 오히려 득보다는 실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정보를 퍼 나르는 것이 인간관계를 깨어지게 할 수 있음을 알려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 삼형제가 나오는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자신의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허물을 폭로합니다. 그러나 두 형제는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아버지의 허물을 덮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허물을 까발린 둘째 아들은 저주하고, 자신의 허물을 덮은 두 형제는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웃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주전 살펴본 것과 같이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의인이자 당대에 완전한 자가 되었습니다. 완전한 자 할 때 히브리 단어는 ‘타미’인데 이 단어로 인간을 칭찬한 경우는 구약 성경에 단 두 명만 존재합니다. 바로 노아와 욥입니다. 성경에서 단 두명만 완전한 자라 칭함을 받은 것이라면 노아는 정말 거룩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처럼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모두는 실수를 합니다. 노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노아가 한 실수가 21절에 나옵니다.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는 포두주를 마시고 만취하여 자신의 방에서 발가벗고 뻗어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요. 여러분의 부모님이 교회 중직자이신데 집에서 술에 취해 뻗어 있는 보신다면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분명히 거룩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노아의 술 취한 모습은 완전한 자가 행할 모습이 절대로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던 노아의 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설교 때 말씀드린 것과 같이 홍수의 심판 때 그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죽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태워달라고 고함치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취하지 않고는 이 트라우마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이제는 만취하여 자신의 행동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노아의 방식이 절대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주님과 깊은 교제로 나아가야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취할 수밖에 없는 노아의 아픔이 전혀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술에 취해 발가 벗고 드러누워 있는 노아의 모습을 둘째 아들 함이 보게 됩니다. 함이 노아를 보고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22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함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고 아비의 허물을 그대로 두 형제에 전합니다. 특별히 ‘알리매’의 히브리어 단어는 ‘나가드’인데 ‘알리다’는 뜻도 있지만 ‘폭로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전후 문맥상 ‘폭로하다’ 로 번역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폭로라는 단어를 언제 쓰는 것입니까? 부정적인 일, 주로 비리, 음모, 잘못 등을 남에게 널리 알리는 행위를 폭로라고 합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고발자가 되어 낫낫이 까발린 것입니다. 

그러나 함의 폭로를 들은 셈과 야벳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23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셈과 야벳은 함과 다르게 아비의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갑니다. 왜 위험하게 뒷걸음질로 들어갑니까? 아비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뒷걸음질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덮을 때도 아버지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채 옷을 덮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실수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 굉장히 노력한 것입니다.  

이들은 왜 아비의 허물을 보는 것까지 하지 않으려 했을까요?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이 볼 때 허물이 겹쳐서 보입니다. 이들은 아버지를 바라볼 때 허물과 겹쳐 보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허물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셈과 야벳에게는 아내가 있고,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허물을 보았다면 자신도 모르게 가족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아내와 손주들이 더 이상 노아를 존경하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예 허물을 보지 않음으로 부정적인 말을 전달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셈과 야벳이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함이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고 오히려 폭로하게 되는 것은 아비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동의 차이는 마음 중심에 사랑이 있고 없고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오직 사랑이 허물을 덮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절대로 폭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셈과 야벳과 같이 허물을 덮고 감싸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세가지 행동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로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은 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상처와 아픔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술 취하여 벗은 모습만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술 취한 모습 보다 술에 취할 수밖에 없는 상처가 먼저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상처가 보이니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허물을 이해하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상황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고, 왜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고, 허물을 덮어줄 수 있습니다. 

특별히 공동체 안에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서로에게 상처되는 말을 하게 되고, 갈등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관계가 생길 때 정말 많이 괴롭습니다. 미운 마음이 계속 올라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그 사람을 품고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상처가 보이게 하십니다. 왜 이런 행동과 말을 하는지 그 사람의 상처를 알려 주심으로 그 사람을 감쌀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웃의 상처를 이해할 때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셈과 야벳처럼 허물을 마주 보지 않으려는 의지적 행동이 필요합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 또한 허물을 퍼뜨리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해서 들어갔고 옷을 덮을 때조차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허물을 덮기 위해서는 허물을 마주 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소문을 들었을 때 우리는 소문의 실체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으려 하고, 아니면 직접 그 사람에게 찾아가 소문이 진짜인지 따져 묻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소문의 실체를 확인해 본들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소문이 진짜라면 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허물이 오버랩 되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소문이 가짜라고 할 지라도 소문을 확인하는 것 자체로 그 사람에게 상처를 안기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오해가 풀릴 수 있는 사안임에도 당사자로 소문을 듣게 함으로 진실 공방 싸움을 일으키며, 서로를 싸우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간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예 소문을 안 듣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여러분 주변에 다른 사람의 허물을 계속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런 대꾸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맞장구 쳐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러분에게 허물을 이야기를 해주는 행동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 맨토되시는 목사님이 한분 계신데 ROTC선배님이시고, 신대원도 선배님이셔서 정말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는 분이십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남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더욱 대단하신 것은 제가 어떤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그 사람의 허물을 이야기해도 절대로 맞장구 쳐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누군가 저에게 찾아와 어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이야기할 때 맞장구를 쳐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로하고 싶기 때문에 같이 욕하고 맞장구 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절대로 맞장구 쳐 주시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안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맞장구는 안 쳐주십니다. 왜 입니까? 다른 사람의 허물과 마주 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맞장구 쳐주지 않음으로 저 또한 남의 허물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맞장구를 쳐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함께 교제하면 남에 대한 이야기를 않게 됩니다. 목사님의 삶에 대해, 저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가 남이야기를 하지 않고, 남 이야기도 듣지 않을 때, 이웃과 은혜를 나누게 될 줄 믿습니다.  

세번째로 허물을 덮어주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가 더 이상 부끄러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옷을 덮어줍니다. 더이상 아버지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한 행동인 것입니다. 저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행동이 중보기도라고 믿습니다. 사실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준답시고 충고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충고가 상처로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충고 보다는 중보기도가 먼저입니다. 누군가 실수하고 넘어졌을 때 중보기도를 해준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셔서 그를 일으키시고 더 이상 죄에 넘어지지 않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기도하면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치 않고 충고를 먼저 한다면 상처가 되어 관계가 깨어지게 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주임재 교회는 충고보다는 기도를 앞서하는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종합해 보면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해야 하고, 두번째로 그 사람의 허물을 마주보지 않아야 하며, 마지막 세번째로 허물을 중보기도로 덮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과 허물을 폭로한 사람이 받는 결과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함이 받은 결과를 알기 원하는데 24-25절 같이 읽습니다.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노아가 깨어서 함이한 행동을 알고 함을 저주합니다. 함은 그의 형제들의 종이 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나안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함이 가나안 족속들의 아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족속은 너무나 악하여 진멸의 대상이 되는 족속입니다. 이웃의 허물을 들추는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의 자녀들도 영향을 받아 허물을 들추고, 허물을 파헤치다 똑 같은 죄를 짓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가문 전체가 진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동일합니다. 교회가 허물을 들추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고, 나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서로 허물을 들추면 자녀 세대들이 똑같이 배워 서로의 허물을 들추게 됩니다. 허물을 들추는 교회는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하더라도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26-27절 같이 읽습니다.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셈과 야벳은 복을 받습니다. 특별히 후손들이 복을 받아 창대하게 됩니다. 후손들이 어른들의 사랑을 배워 서로 사랑하는 문화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문화가 넘치는 셈 가문에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고, 이삭과 야곱이 태어나며, 야곱의 12아들이 태어났고, 결국 메시야가 태어납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허물을 사랑으로 덮는 교회는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허물을 덮기 위해 그 사람의 상처를 보며, 허물을 마주 보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중보로 덮는다면 그 사람도 살고 나도 살게 됩니다. 함께 사랑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교회 개척을 하기 전 부모님을 만나 뵈러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랜 만에 한국에 가니 모교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수요예배 때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설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이 난 이유는 거기 앉아 계신 성도님들의 기도 때문에 제가 목사가 될 수 있었음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제가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우고, 당구치고 비행 청소년으로 살았습니다. 모태 신앙이기 때문에 교회는 다녔지만 예배 시간에도 딴짓을 하고, 반별 성경공부 시간에는 선생님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들과 교회 어르신들은 저를 혼내기 보다 사랑으로 감싸 주셨습니다.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고, 격려해 주셨으며, 힘내라고 맛있는 것을 사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섬겨 주시는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어르신들이 있으셨기 때문에 끝내는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만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저의 동기들 5명이 목사가 되었는데 하나 같이 문제가 많은 친구들이었습니다. 모두가 모나고, 한 성격하며, 뭔가 문제가 있는 친구들인데 끊임없는 사랑과 기도가 있으니 5명의 친구가 목사로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모교회는 요즘 부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희 모 교회는 8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오래된 교회일수록 오래된 갈등들이 산재한 경우가 많지만 저의 모교회는 사랑으로 감싸는 교회였기 때문에 그러한 갈등들이 잘 없습니다. 갈등이 있을 때도 기도하고, 서로가 중재자가 되어 하나된 마음으로 잘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잘 버티다 보니 하나님께서 좋은 목회자분을 선물로 보내 주셨고, 지금은 크게 부흥을 하고 있습니다. 허물을 덮는 교회는 반드시 부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실 허물을 덮어주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절 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허물을 자신이 다 뒤집어 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가 벗은 수치를 덮어 주시기 위해 자신이 발가 벗겨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에 대한 징계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사탄의 참소하는 입은 봉하여 졌고, 그로 인해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어 세상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도 우리의 이웃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은 당연하며, 누군가의 허물을 볼 때 나의 허물로 여기고, 진실로 회개하며, 중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허물을 덮어 주는 자가 되어 주임재 교회 가운데 하늘의 복이 임하게 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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