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나님의 집으로(시 91:1, 왕상 18:30-40)
김주엽 목사 (토론토 강림교회)
오늘은 중국인 2세 크리스토퍼 위안의 책 ‘다시 집으로(Out of A Far Country)’라는 현대판 탕자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치과의사를 준비하던 그는 마약, 마약 판매, 동성애와 HIV증세로 고통 중에 빠졌습니다. 그의 어머니 안젤라 위안은 그런 아들로 인하여 아픔을 경험하였습니다. 또한 치과 병원을 운영하다가 사업 실패로 좌절을 경험하였고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런 모자가 하나님을 만나서 치유받고 회복된 이야기입니다. 크리스토퍼와 안젤라 위한과 같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품속에서 안식을 찾고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다시 하나님의 집에 머문다”는 의미는 “신앙의 출발점을 되찾았다”는 말씀입니다. 벧엘 들녘에서 갈 바를 잃고 방황하던 야곱이 하나님의 집을 경험하고는 본격적인 그의 신앙의 첫 출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탕자도 그의 새 출발은 아버집의 집입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한 성숙한 신앙, 세상과 다른 신앙의 힘과 능력을 보여 주는 공동체도 그리스도 예수와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실 집으로 지어져 간다 (엡 2:21-22)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 혹은 ‘성전’을 세워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그 집에서 영원히 머물 것을, 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라는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1. 하나님의 집을 찾아가서 그곳에 머무십시오.
시편 91편의 요점은 ‘하나님 품 안에서의 안전’입니다. 그 안전을 보호하는 장소는 ‘피난처’, ‘요새’, ‘날개’, ‘거처’, ‘그늘’ 입니다. 이 은유의 단어들은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하나님의 집’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내 영혼의 쉼터요, 평안의 안식처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지요, 다시 돌아와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영혼의 종점’이 되는 곳을 말씀합니다.
시편 91편 1절 ‘하나님의 품 속에서의 안전’을 제일 먼저 표현한 단어 ‘은밀한 곳(Secret Place)’은 ‘세테르’인데, 비밀장소로서 누구에게나 함부로 공개되지 않고 곳인 ‘성전의 지성소’를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영향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스라엘의 왕조차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장소, 하나님의 공간입니다. 이 ‘지성소(은밀한 곳)’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우리가 더 없이 깊고 가까운 친교와 교제 속으로 들어갈 때’를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입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이 은밀한 곳을 ‘몸을 숨기며’ (공동번역), ‘보호를 받으면서’ (표준 새번역)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몸과 영혼의 안전 그리고 쉼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통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는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거주하며’(1절) 라는 말의 뜻도 재미있습니다. ‘야솨브’ 라는 단어인데, 문맥을 따라 ‘여호와의 품 안에서 거한다’ 라고 번역을 하였지만, ‘왕좌에 앉다’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고단한 세상 속에 우리의 존재감, 자존감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 품 안에 머물면서 되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향하여 가락지를 끼우고 가장 좋은 새 옷을 입히며’ (눅 15:22), 귀한 아들의 존재감을 찾는 일이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품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가락지를 끼운다는 뜻은 “다시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고, 왕의 권위를 이어받을 왕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 그의 지위가 복원되었다!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하나님의 왕자, 공주가 됩니다. 자존감 없는 사람들이 성공하기도 힘들고 어렵지만, 간혹 자존감 없는 사람들의 성공이 오히려 공동체에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지난 금요일 마음가꾸기 시간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날의 상처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기도 하지만, 때론 상처입은 사람들의 성공이 독이 되기도 한다.”
다시 돌아가서 1절 끝에 ‘거주한다 (이틀로난, stay, 혹은 abide)’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거주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의 ‘거하라 (stay 혹은 abide)’입니다. 문자적으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밤을 새우다, 숙박한다” 라는 말입니다. 1절을 의역하면 이런 표현이 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집, 지성소를 찾아 머무는 이가 존귀한 사람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아래 밤을 지내며 안전하게 거하리로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지성소)에서 내 안전이 보장되고, 내 가치와 존귀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집에 머물면서 영양분을 공급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91편의 기자가 하나님의 집에서 발견하는 것은 세상의 많은 재앙과 공격에 대한 ‘안전과 보호’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서 확인하는 것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인생과 영혼의 흉년을 만나게 되지만 아버지와 함께하면 언제나 회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회복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장 7절과 10절에 말씀하십니다. ‘내 말’(7절, 레마, 많은 설명(a flow of words)과 가르침) 그리고 ‘내 계명’(entole, 권위가 있는 처방)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과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많은 대화를 시도합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폴 영의 ‘오두막’이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심과 예수님의 본심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그 예수님의 본심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 (do this!)’ 또는 ‘하지마! (do not this!)’ 라고만 이해한다면 또 다른 율법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내 영혼의 지침과 계명으로 믿고, 삶의 원칙과 지침으로 삼는 기초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신뢰와 믿음입니다. 여기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대화입니다. Abide 라는 단어를 소개하면서 ‘버틴다’ 또는 ‘견딘다’는 라는 뜻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찍이 23세에 혼자가 되신 어머니의 뱃속 자녀로 태어난 어떤 딸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수고로 유학도 하고, 나중에는 저명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이후 교회를 떠났던 딸은 어머니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잠시 교회를 둘러 보는데 실망이 컸습니다. 여자들이 모여서 남자들 험담을 하고, 교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처음 본 자신에게 아들 대학 입학을 청탁하고, 회의실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너무 화가 난 딸은 어머니의 손을 끌고 집으로 가자고 재촉합니다. 그 때 조용하기만 하던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에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딱 하루 교회에 와서는 참 많이도 봤구나.” 이 말에 딸 교수는 무너졌습니다. 생각없이 교회에 와서 그저 딸 잘 되기위해 교회 다닌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보는 수준과 자기의 보는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중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언약의 복된 계명으로 다가오는 은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 곧 한 결같은 눈 길에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양육 받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안에 머뭅니다. 말씀 속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과 선한 뜻을 발견합니다.
3. 하나님 집에 머물면서 예배의 재단을 보수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집에 머물고 내 영혼의 집을 세워갈 때, 팬데믹 가운데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은 기도의 사람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먼저 나의 제단을 수축(Rebuild my Altar)해야 합니다. 제단을 수축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서 기본을 세우는 일입니다. 부흥의 또 다른 이름이 재건(Rebuild) 입니다. 다시 일어나 세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모습입니다. 신약적 표현으로는 건축으로 ‘지어져 감’ 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대하여 함께 제단을 쌓고 함께 기도합니다. 그들은 불의 응답과 물(비)의 응답, 서로 상극인 문제들이 해결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 경험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응답이 간절합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는 습관과 일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헌신하고 충성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응답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제단을 보수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끊어졌던 관계의 회복, 경배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열왕기상 18:30절에 보면, 엘리야는 백성들을 제단 보수에 함께 참여시켰고, 수리가 되는 것을 지켜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단을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는 것은 바알 신에게 무언인가를 기대하며 희망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바알은 뒤로 하고 제단을 수리하는 것은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신앙의 견고함을 쌓아가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결단과 고백의 내용들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은 무너져야 할 바알의 제단은 견고하였고, 반면에 견고해야 할 하나님의 제단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제단을 재건하는 일을 나의 사건, 나의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언제나 성경이야기(Bible Story)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나의 이야기, 나의 노래(this is my story, my song)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쌓고 있는 기도의 제단, 묵상의 제단, 봉사와 섬김의 제단이 무너져 있음이 내 영혼의 가장 큰 위기라는 자각(Self-Awareness)이 있어야 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과 운명이 바뀐 내용을 다시 소개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창 32:6에 보면 바로 ‘변화’입니다.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면서 가족과 이웃에 상처와 피해를 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잘못된 신앙의 자세요, 삶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로 바뀐 야곱은 자신의 연약함과 완악함을 알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의존적인 자세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는 패배자의 굴욕이 아닌 승리자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이름과 함께 새 약속을 받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이루었습니다. 엘리야가 야곱의 제단과 예배를 다시 떠 올린 이유는 하나님의 집에서 달라진 삶의 자세와 내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9절의 고백이 모든 공동체 즉 가정이나, 교회안에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혼자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혼자 헌신하고 수고하다 보면, 탈진(Burn Out)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이러스 시대에 많은 크리스찬들이 엘리야 증후군 (Elijah Syndrome)을 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혼자서 문제를 풀고 혼자서 모든 일들을 감당하다가 탈진하고 스스로가 좌절과 고독의 동굴에 빠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걱정하시게 하는 일입니다.” (Prayer, and Let God Worry)이라고 하였습니다. 루터가 좋아하였던 성경구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시편 46:10)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팬데믹 상황이 계속되다보니 마음이 무뎌지기도 합니다. 전문가들은 내년이면 정상을 회복할 것이라는 반가운 예측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방역 전문가들의 예측처럼 ‘코로나와 함께 (with Covid)’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겐 영적 백신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with God)!’ 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집에 머물며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큰 기쁨을 누리시는 한주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