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믿음(사도행전 17장 1-9절)
밴쿠버지구촌교회 김봉수 목사
흐르는 강물에서 죽은 물고기와 살아 있는 물고기를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죽은 물고기는 물의 흐름에 따라 둥둥 떠다니고 맙니다. 강물에 밀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헤치고 올라갑니다. 물살을 헤치고 올라가는 것이 비록 힘에 겹지만, 물살을 헤치고 올라 가는 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믿음과 죽어 있는 믿음을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살아 있는 믿음은 세상의 도전과 풍조와 맞서는 삶을 통해 증명됩니다. 비록 세상의 도전과 풍조에 맞서는 삶이 힘에 겹지만 말씀에 반응하며, 세상의 풍조와 가치를 거슬러 올라 가고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입술로는 믿습니다.” 말을 해 놓고, 세상의 풍조와 습관과 가치에 순응하며 산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일 것입니다.
계시록 3장의 사데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사데 라는 도시는 황금의 도시라는 별명처럼 금이 풍부한 곳이었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물질과 자원과 사람이 풍부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사데 교회는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교회사가 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교회보다도 잘 갖춰지고 신앙의 경륜과 자랑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또한 사데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살아 있다는 평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평가는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살아 있는 교회라고 평가했으나 하나님은 죽은 교회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그 믿음의 옷이 대부분 더러워졌기 때문이며, 당시 세상의 풍조와 삶의 방식에 둥둥 떠 다녔기 때문에 믿음의 옷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믿음은 세상의 풍조와 삶의 방식을 거스름으로 인해 불편함과 힘겨움을 가지고 있으나, 믿음의 생동감과 영적 기쁨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한 바울의 모습을 통해, ①무엇이 우리의 믿음을 살아 있게 만드는지, ②살아 있는 믿음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도록 매를 맞고 감옥에서 풀려 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멈추지 않고, 다시 유대인들이 있는 회당에 들어가 3주에 걸쳐 말씀을 강론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부터 유대 사회에서는 바울에 대한 반감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알면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살아 있는 믿음(Active faith)”을 소유했기에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의 핍박과 도전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되어야 세상의 도전과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믿음 때문에 세상의 문화와 가치와 도전과 맞서는 긴장감과 갈등이 있다면, 세상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 가고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까? 3절 말씀입니다.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은 성경의 뜻을 풀어 너희가 기다리고 있는 그 메시야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3주 간에 걸쳐 성경의 뜻을 풀어 예수를 말할 때, 바울은 분명 자신이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과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야기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분명히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는 바울이 삶 속에서 만난 그 예수가, 너희가 성경을 통해 기다리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성경에서 만난 예수를, 삶에서 만나고, 삶에서 만난 그 예수를 성경에서 만나(확인하)는 믿음의 현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성경의 예수를 삶에서 만나고, 삶 속에서 만난 예수를 성경에서 만났기 때문에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한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랭리 교회로 이사를 올 때, 비전 센터에서 새벽 마다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눈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루는 새벽 예배를 마치고 1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아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장면을 보여 주셨다. 성도들이 기도하는 그곳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하나님의 귀가 성전의 기도 소리를 듣고 계시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역대하 7장 15-16절 말씀을 생각났습니다. “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이 말을 서로 나누는데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살아 역사하시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삶의 현장에 만난 하나님을 성경에서 만났을 때, 그리고 성경에서 만난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만났을 때, 우리의 심령과 마음은 주님을 향해서 살아 납니다. 살아 있는 믿음으로 반응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통해 예수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되었다 할지라도, 삶에서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믿음과 신앙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Dry하고, 종교적으로 변질되며, 봉사와 열심은 있는데 기쁨과 능력이 없습니다.
5절-6절에 나타난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를 알았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삶의 현장에서 만나지 못했기에 바울과 실라를 시기하여 불량배를 대동하여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졌던 야손의 집에 쳐들어 가, 무리를 선동하여 야손을 재판을 하고야 맙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 속의 메시야를 익히 알고 있지만, 예수를 삶의 현장에서 만나지 못하니까,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사람을 선동하고 괴롭게 하는 열심에 불과했습니다.
반대로,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면 그 가슴이 뜨거워 지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눅24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다는 것만으로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보고, 다시 예전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 갑니다.
이 두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왜 이들은 지난 3년 동안 주님을 따랐던 뜨거운 마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옛 삶의 자리로 돌아 가고 있는 것입니까?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만난 주님을 말씀 속에서 만나는 믿음의 현장이 없을 때, 삶을 변화시키는 의지에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가치가 변하지 않습니다. 영적 근육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만난 주님을, 말씀 속에서 만나면, 그 때 삶을 변화 시키는 힘과 능력이 생깁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난 후, 어디로 가게 됩니까? 약속한 성령을 기다려야 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 갑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된 것이며, 삶의 현장에서 만난 예수님을 성경에서 만나고, 성경에서 만난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서 만날 때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삶의 현장에서 만난 주님을 성경에서 만나고, 성경에서 만난 주님을 삶의 현장에서 만나게 해달라고 성령께 간구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표현이 됩니까? 4절 말씀입니다.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을 따랐다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핍박을 하는 중에도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의 고난과 핍박을 거스르는 살아 있는 믿음의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보여 주는 살아 있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살전 1장 3절 말씀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살아 있는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는지 3가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으로 살아 낸 성도의 흔적과 승리를 말해 줍니다. 살전 1:6절에 보면, 환난 중에도 주님을 본받은 삶이 마케도냐와 아가야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환란 속에서도 믿음의 흔적과 승리, 믿음의 역사가 삶 속에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가 삶 속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절대 주님을 떠나서 살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살아 있는 믿음은 사랑의 수고로 나타납니다. 수고와 헌신은 사랑에 근거해서 나오는 힘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피곤해도 아이를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피곤하지만, 사랑의 수고로 아이를 성장시키고, 가정을 위해 일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수고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란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처럼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도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성장하도록 아낌 없는 수고를 하게 됩니다. 사랑의 수고로 돌봄이 있는 삶이 살아 있는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믿음은 소망의 인내로 나타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환란을 지나 갈 때,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소망했습니다. 특별히 주님을 기다리며 내 삶을 구원해 주시기를 소망하는 인내로 환란을 지나갔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환란을 지나 갈 때, 다가오는 미래가 믿음의 역사가 되도록 인내로 주님을 소망하며 기다리게 됩니다.
시편 40편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여호와께서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 올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은 성도의 삶 속에 임한 환란입니다. 그 때 여호와를 기다린 것은 인내로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소망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의 인내로 주님을 기다릴 때,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져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내로 주님을 기다리며 구원을 소망하는 것은, 미래를 또 하나의 믿음의 역사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믿음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의 인내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으로 승리한 과거의 영광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살아 있는 믿음을 증명해 주는 현재의 영광입니다. 소망으로 인내한 것은, 다가올 미래를 믿음의 역사가 되게 하는 미래의 영광입니다.
성경에서 만난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서 만나십시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만난 예수님을 성경 안에서 만나십시오. 이 두 가지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