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부제: 대한민국에서 핑계로 성공한 사람은 김건모 밖에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클럽의 회원처럼 정기적으로 출석하며, 소정의 회비를 내고, 그 클럽 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후안 까를로스, 제자입니까 중)
일요일 11시 교회 출석, 적당한 헌금, 적절한 나이스함.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크리스챤의 정체성은 ‘주님을 따르는 것’에 있습니다.
눅9:57-62에는 주님을 따르기 포기한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핑계’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먼저 나서서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자신은 따르겠노라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그는 서기관이었습니다. 이미 사회에서 어느정도의 삶이 보장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결단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의 속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절).
그 서기관은 이미 계산 다 끝내고 찾아온 겁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자기 인생이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줄 알았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는 주님의 말씀은 “나 이렇게 불쌍한 상태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지금 나그네로써 지나가는 중이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를 지나고, 사마리아를 지나가고, 예루살렘을 지나고, 골고다 십자가를 지나서 하늘 본향으로 향하시는 중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나그네로써 길을 걷고 계시니 짐이 가벼운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에게 나를 따르는 삶이란 이 땅에선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나그네가 되는 것인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은 모두 예수님을 따르고는 싶은데, 그런데 ‘먼저’ 할 일이 있다 합니다.(59, 61절) 두 번째 사람은 ‘아버지 장례’부터, 세 번째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부터 하고 와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허락치 않으십니다.
주님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매정하고 몰인정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족을 돌보길 누구보다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신 이유는 첫 번째 사람과 같이 이 둘의 속마음을 꿰뚫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 핑계대고 있음을 아셨던 겁니다. 두 번째 사람의 아버지, 사실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하필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그 날 갑자기 돌아가셨을리가 만무하고, 만일 돌아가셔서 장례가 시작되었더라면 그가 길 위에 나와 예수님을 만났을리도 예수님이 그를 찾아가 장례고 뭐고 다 그만두고 나를 따르라 하셨을리도 없습니다. 세 번째 사람 역시 가장 먹힐만한(누구도 허락할 수 밖에 없는) 가족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을 주님은 정확히 꿰뚫어 보셨던 겁니다. 위의 세 사람은 그래서 결국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아쉽게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궁금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궁금합니다. 이 이야기의 끝에는 “그래서 나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남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길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면서 일하러 가지 않는다.(잠26:13. 현대인의 성경) 사람은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안하고 싶어합니다. 길거리에 사자가 있을리가요?
우리에겐 지금 내가 주님을 따르기 못하는 수만가지의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핑계는 사실은 은혜를 깊이 경험하지 못한데서 기인합니다. 달라스 윌라드의 말처럼 은혜를 받으면 순종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올바른 순종이 시작됩니다. 참된 은혜는 우리를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 위에 담대히 서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늘 깨어지기 쉬운 결단보다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우리 주님은 그 길 위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우리가 부름받고 있는 길은 꽃길이 아니라 흙길입니다.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낮아지는 길입니다. 섬김을 받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길입니다. 네! 우리는 분명히 좁고 협착한 길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