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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동네목사개척이야기] “너 때문에”라고 화가 났다면

“너 때문에”라고 화가 났다면

“잘 되면 제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있다.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은 조상까지 끌어들여서라도 전가시키고, 모든 공은 자기에게만 돌린다는 의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 현상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다.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마다 정부의 발표에는 ‘전임자들이 이미 망쳐 놓은 일이라서’라는 대답이 빠지지 않는다. 이 말은 일단, 문제적 상황에 대한 책임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 말이 효과가 있기 위해서는 책임 전가의 대상에게 감정적 단어를 부각시켜 비난해야 한다. 그런데 이 방법이 반복되어 사용될수록 ‘문제 회피’라는 그늘을 갖게 된다. 자기가 쏜 화살이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셈이다.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복잡하게 꼬여만 간다.

이 부분에서 조직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양상으로 문제가 일어난다. 남탓을 전면에 부각시키니 정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다 남탓과 니탓 사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남탓과 니탓이 메스컴 노출 빈도가 커져감에 따라 아래쪽으로 침하된다. 그래서 국민들도, 아이들도 다양한 문제 상황에 대해 다른 사람 탓을 하며 “문제 회피”가 방어기제가 되어 간다. 문제는 방어기제는 상용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성격과 삶의 방향에 고착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책임전가와 회피에 의해 성격이 형성되고 삶의 방식이 된다는 점이다. 만일 사람들이 큰 잘못을 하고도 남탓하며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 신뢰라는 커다란 자산이 파산나고 문제 해결 능력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요사이 일터에서, 가정에서, 이웃과 친구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고 감정에 상처가 나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상처가 다른 사람탓이라고만 말하는 현상이 늘어만 가는 것 같다. “나만 피해자고, 내가 상처입었다”는 협곡이 커져만 간다.

어떤 사람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고는 ‘술에 취서라며 술탓’을 한다. 다른 사람은 ‘어릴 때 자란 환경 탓’을 하고, ‘부모에게 학대를 받아서’라고 변명한다. 본인을 돌아보고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그저 환경과 상황, 사회탓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다. 나쁜 일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억울한 피해자’라고만 둘러대는 사고방식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탓, 환경탓, 세상탓하는 사이 우리는 감정의 깊은 곳이 불편한 감정으로 지배된다. 왜냐하면 “너 때문에” 불쾌하다, 속상하다, 이렇게 됐다는 감정이 중심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사람은 관계의 동물이기 때문에 인생의 많은 사건들은 단독의 책임이기보다는 함께 하는 사람들의 간섭과 참여 속에 일어난다. 때문에 책임소지는 다양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책음을 쏙빼고 다른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면 그 조직은 생산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는 끝장난 상태가 된다.

사실 어떤 사건에 대해 “너 때문”이라는 탓이 떠오를 때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전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 상황에 대해 “너 때문에” 힘들었던 마땅한 이유가 있지만 안타까운 것은 남탓, 세상탓, 환경탓에 빠져 쟁론하는 사이에 본인은 부정적 감정에 자아가 갇히게 될 것이고, 속 좁은 사람으로 전락할 것이다. 어느 순간 남탓하는 인생으로 함몰되어 결국 소중한 인생을 남탓하느라 낭비하게 된다.

결국 탓과 원망은 삶의 감격과 감동을 죽이고 우리의 모든 관계를 깨뜨며 삶의 문제를 풀어낼 수 없다. 단지 탓과 원망에 갇히는 것이다. 관계와 진실을 잃어버린 죽은 삶이 된다.

탓하는 마음은 단한번도 제대로된 출발선에 서보지 못한 마음이다. 제대로된 출발선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헤아려보고, 이 사건과 상황에 대한 인식에 나의 잘못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문제적 상황에 대해 자신의 책임과 부담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발원된 어려움에 대해 책임지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당당하고 의로운 마음이다.

어떤 사람들이 문제를 회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 문제의 본질은 결코 마주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책임 회피가 삶의 방식이 될 때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릴뿐 아니라 누군가를 모함하거나 발뺌하는 사이에 자신의 양심마져 죽어가는 비참한 이기적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태도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 감당해야 할 일은 태만히 하면서 돈 많은 사람을, 먼저 성취한 사람들을 부러워만 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동경하지만 거기에 따르는 치열한 댓가는 결코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다. 단한번도 자기 삶에 치열했는지를 점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된 출발선에 서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성경은 탓과 원망의 굴레에서 빠져 나오라고 한다. 그리고 탓과 원망의 끝자락에는 멸망이라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환경을, 다른 사람을 탓”하려는 마음이 들 때 성경은 “지금이 기회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기회일까? 자신을 돌아볼 기회이다. 자신을 돌아볼 때 제대로된 출발선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제대로된 출발선에 서보면, 탓과 원망을 벗어나면 열린 마음으로 문제를 보게 되고, 객관적인 사고를 하게 되며, 감정에 사로잡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 포착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 부분에서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창세기의 요셉을 보라 그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자기가 당한 불의의 사건들에 대해 탓하지 않는 것이다. 이복형제탓, 보디발의 아내탓, 술 맡은 관원장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탓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매일 선택하는 능력이었다. 이것은 예나 지금 똑같이 적용되는 힘이다. 그렇다. 우리 역시 탓할만한 충분한 상황에서 탓에 함몰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탓에서 벗어나라. 새로운 삶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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