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마지막 기회: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를 바라보자

[칼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마지막 기회: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를 바라보자

마지막 기회: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서 벳세다(Bethsaida)에서 출발해서 여리고(Jericho)에 도착하는 길 위에서(on the way)의 여정은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시는 사건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미 마가복음 8장 22-26절의 본문을 주석하면서 생각해 보았듯이, 마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 사건을 벳세다를 출발해서 여리고에 도착하는 길 위에서(on the way)의 가르침의 처음(막 8:22-26)과 끝(막 10:46-52)에 배치하는 샌드위치 구조(Sandwich structure) 기법을 통해서 자신의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도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번의 수난 예고(막 8:31; 9:31; 10:33-34)의 의미를 깨닫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여리고가 아니라 예루살렘이기 때문에(막 10:32), 마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를 통과하는 모습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를 원하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사렛 사람 예수가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막 10:46) 그리고 그들이 여리고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예수)가 여리고에서 그의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과 함께 나가고 있을 때,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이 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47) 그리고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들었을 때 소리치기 시작하며 말하기를,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48)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49) 그러자 예수가 걸음을 멈추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데리고 오라.” 그러자 그들이 눈먼 사람을 부르며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용기를 내라, 일어나라, 그(예수)가 너를 부르신다.” (50) 그러자 그가 자신의 겉옷을 내던지고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기를 네가 원하느냐?” 그 눈먼 사람이 그(예수)에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내가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52)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러자 즉시 그가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길에서 그(예수)를 따랐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마가복음에 기록된 치유 사건 가운데에서 환자의 이름이 직접 언급된 경우는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를 고쳐 주신 사건이 유일합니다. ‘바디매오’(Bartimaeus)는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람어 ‘바르’(bar)와 그의 아버지 ‘디매오’(Timaious)의 이름이 결합된 이름으로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디매오’는 헬라식 이름으로, ‘존경 받다’라는 동사 ‘티마오’(timao: to honor)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메오’는 ‘가치 있는’(valuable) 또는 ‘존경받는’(honored)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디매오’는 ‘존경받는 자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바디매오’의 삶을 바라보면, 그는 거지이면서 시각 장애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가난한 거지이자 시각 장애인은 사회적, 종교적으로 버림 받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1세기에 스스로를 새로운 언약 공동체라고 믿고 있었던 쿰란 공동체의 문서를 보면, 시각 장애인(blind)들은 육체적으로 부정함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공동체 안에서 직무에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4)…and no-one who is defiled by these should be (5)established in his office amongst the congregation: everyone who is defiled in his flesh, paralysed in his feet or (6) in his hands, lame, blind, deaf, dumb or defiled in his flesh with a blemish (7) visible to the eyes, or the tottering old man who cannot keep upright in the midst of the assembly; (1Q24a, Col. ii. 5-7)

이러한 배경에서 마가가 ‘바디매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주 특별합니다. 마가복음 10:17-22절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을 반영해 보면, 마가가 당시 부(富)를 하나님의 복으로 여겼던 사회에서 부자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고, 거지이면서 시각 장애인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길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걸을 바라며 앉아 있었던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삶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바디매오가 처음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b)라고 불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바디매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꾸지람을 받았습니다(막 10:48a).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습니다(막 10:48c).

바디매오는 왜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the Son of David)이라고 불렀습니까?

구약 성경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를 받고 있을 동안에 다윗 왕조의 부활을 가져올 미래의 인물로 예언되었습니다(사 9:7; 렘 33:17; 시 89:3-4; 132:11-12). 따라서 제2 성전기 시간에 ‘다윗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일으킬 ‘메시아’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개념입니다(채영삼, ‘마태복음에 나타난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 신약논단 18.1(2011), pp.68-71).

에스겔서 34:14-16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목자로 언급하시면서(겔 34:11), 목자의 역할을 치유의 사역과도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겔 34:16) 내가 그 잃어버린 것을 찾으며, 그 흩어진 것을 돌아오게 하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며, 병든 것을 강하게 할 것이나, 살진 것과 강한 것은 내가 멸하며 공의로 그들을 먹일 것이다. (바른 성경)

하나님께서 참된 목자가 되셨을 때, 그 역할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종말론적 목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임명 받은 다윗은 선한 목자가 되어서 병든 자를 치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겔 34:21-23).

(겔 34:23) 내가 그들을 먹이는 한 목자, 곧 내 종 다윗을 그들 위에 세울 것이니,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는 그들에게 목자가 될 것이다. (바른 성경)

결과적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목자로서 언약의 백성들을 향한 치료의 역할도 감당하고 있고,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호칭하면서,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두 번이나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처음 바디매오의 요청을 들은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예루살렘을 향한 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오히려 바디매오는 자신의 외침을 잠재우려고 하는 무리들의 꾸지람을 받게 되었습니다(막 10:48a).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큰 목소리로 예수님께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8c)라고 외쳤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데리고 오라”(막 10:49b)라고 말씀하셨고, 무리는 바디매오에게 “용기를 내라, 일어나라, 그(예수)가 너를 부르신다.”라고 언급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인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청각은 소통의 통로였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겉옷’(himation: garment)을 내던지고(apoballo: to take off) 일어나서 예수님께 갑니다(막 10:50).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구걸의 행위에서 사람들이 던지는 동전을 받기 위해서 바닥에 깔아 놓는 용도와, 밤의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보호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는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겉옷을 벗어 던지는 행동을 통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aphiemi: to leave) 예수님을 따랐고(막 1:16-20),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태)도 자신의 높은 직함 세관의 자리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막 2:14). 이와 반대로 바디매오가 겉옷을 버리는 행동은 많은 것을 소유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돌아갔던 부자(막 10:17-22)와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기를 네가 원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바로 그 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랍오니’(rhabbouni)라고 부릅니다. 처음 나사렛 예수가 여리고를 지나갈 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랍오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master)라고 부르면서, 보다 높은 존경심과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로서의 신뢰감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랍오니’라고 부르면서 “내가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막 10:51d)라고 대답합니다. 바디매오가 사용한 “아나브레포’(anablepo)의 일차적 의미는 ‘위쪽을 보다’(to look up)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동사가 ‘시각 장애인’(a blind person)과 연결해서 사용이 되면, ‘다시 시력을 회복하다’(to regain sight)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디매오는 선천적 시각 장애인이 아니라 후천성 시각 장애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의 요청에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막 10:52b)라고 말씀하셨고, 바디매오는 즉시(euthys: immediately 다시 보게 되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은 신체적 치유와 영적 구원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믿음에 근거해서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로 신뢰하였을 때 그 믿음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를 뛰어넘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신뢰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디매오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부자와 다르게 ‘길 위에서’ 고침을 받아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바디매오는 더 이상 마가복음에 등장하지 않지만, 그 역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을 것입니다.

마가는 바디매오가 고침 받는 사건을 벳세다에서 여리고에 도착하는 길 위에서(on the way) 마지막 사건으로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도 바디매오처럼 영적인 눈을 떠서 고난 받는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가에 앉은 자’를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함께 나누기>

  1. 마가가 벳세다에서 출발해서 여리고에 도착하는 길 위에서의 가르침의 처음과 끝에 시각 장애인이 고침을 받는 사건을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마가복음에서 고침을 받는 환자의 이름이 직접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바디매오가 유일합니다. 바디매오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이고, 왜 마가는 바디매오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까?
  1.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the Son of David)이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무엇입니까?
  1.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어떠한 의미이고, 그가 자신의 겉옷을 버린 상징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바디매오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랍오니’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바디매오는 선천성 시각 장애인입니까? 아니면 후천성 시각 장애인입니까? 만일 후천성 시각 장애인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막 10:52b)라는 말씀이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디매오는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1. 마가가 바디매오의 사건을 벳세다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 위에서 여정의 마지막 사건으로 기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spot_img

최신 뉴스

인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