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3) 율법 위의 법칙
“은혜”라는 말 보다 더 놀라운 단어는 없습니다. 이 말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왕이 준 과분한 총애나 자비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되는 것인 진노를 당연히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입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흉악한 모든 죄를 범했던 존 뉴톤은 그 은혜를 경험한 후 이런 시를 썼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놀라운 은혜 얼마나 달콤한 소리이가, that saved a wretch like me! 그 은혜는 나처럼 악마같은 자를 구원했네!”
이 은혜의 질서를 이해하는 가장 훌륭한 지름길은 율법과 대조시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질서의 근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바울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법 아래 산다는 말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나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 받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법 아래 사는 사람은 도덕과 윤리와 율법을 실천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믿습니다. 소위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을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규정합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은혜 아래 산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본성이 새로워진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이 사람은 그의 존재의 근본이 변화된 사람으로 개인의 공로와 상관없이 거룩하고 위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은혜 아래 생활하는 사람들의 표준이 되는 삶은 율법주의자들의 그것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같이 은혜 아래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과 범위는 그 어떤 사상과 정신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보다 더 높고 깊고 광대하며 위대합니다. 이것이 왜 가능한지를 성경은 분명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알려줍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는 천지 창조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그들의 삶에 거하십니다. 성령은 초인간적인 삶의 법칙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실행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능력을 제공해 주십니다. 은혜의 가르침 중 이것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없습니다. 은혜 아래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삶에는 전능하시고, 내주하시며, 또한 완전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이 진술은 계시된 성경 말씀에 의해 풍부하게 확증됩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은혜 아래 초인간적인 삶의 방식은 그리스도의 몸 전체 안에 있는 어떤 영적 공동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신자들의 삶에 똑같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초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모든 신자들이 동일하게 소유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 초인간적인 표준에 따라 생활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이제 우리가 그토록 소원하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은혜의 가르침의 표준은 율법의 표준을 능가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동일한 예를 통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고 , 형제가 잘못하거든 타일러라. 사람이 너에게 나쁜 일을 했다 해도, 복수하거나 앙심을 품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예수님은 은혜 아래 초인간적인 삶의 원칙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은혜의 표준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사랑의 표준을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율법은 제한된 정도의 사랑을 요구합니다. 은혜는 무제한의 사랑이 있습니다. 율법이 제시한 사랑은 은혜 아래 제시된 사랑의 표준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의 차이의 기반은 성령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진리를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표준에 따라 생활합니다. 첫째는 율법의 표준에 따라 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은혜에 이끌려서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위대한 요구가 육체의 힘으로 수행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제한될 것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수행된다면, 그 일은 순전히 은혜로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행위에 근거한 율법적인 삶은 언약의 범위를 벗어 날 수도 없으며 그 언약의 내용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율법 아래에 있습니까? 성경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