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2), 살아 있는 모범
초기 기독교 신앙의 배경이 되는 유대인들의 교육은 주로 가정에서 이뤄졌습니다. 생활 전반이 종교와 연결된 유대 사회에서는 성장하는 자녀들에 살아 있는 삶의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종교적 삶은 자식들에게 직접적인 신앙의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모든 교육은 집에서 시작된 것의 확장이며 연속으로 여겨졌습니다. 가정의 교육은 결코 이론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집과 공공장소에서 부모의 종교적 행동을 적극적으로 모방하는 것에 기초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 초에 편찬된 잠언서는 진정한 학습은 부모를 본받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버지의 교훈을 듣고, 네 어머니의 가르침을 배척하지 마라. 그것은 네 머리에 쓸 아름다운 화관이요. 네 목에 걸 목걸이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에 글을 쓴 벤 시라흐는 아버지에게 가장 큰 보상은 아들이 아버지를 본받아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죽어도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와 같은 사람을 남기기 때문이니라.” 자식들은 가족 종교 생활에 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삶의 방식을 배웠습니다. 부모들의 일상의 삶은 자식들에게 신앙의 증거였습니다.
1세기 유대 사회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장 중요시 했던 것은 “토라” 교육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닮는 사람을 양육하기 위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을 알려 주는 것이 토라 교육이었습니다. 토라 교육은 살아 있는 모범으로부터 전수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스승을 찾는 것”이 필수 과제였습니다. 구전 교육과 더불어 살아있는 스승을 본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성경을 제외한 서면 텍스트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이론적 지식과 대조적으로 토라의 가르침 방식은 지속적으로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랍비 샤마이는 “토라를 고정된 의무로 삼으십시오.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은 많이 하십시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르침은 단순히 구전 형태로 고정된 전통을 전수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전통을 체현하고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 살아 있는 교사들의 삶을 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선생님과 함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들을 따라 다니며 항상 선생님이 하는 일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유대교 교부들은 젊은이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지혜로운 사람들과 보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당신의 집을 지혜로운 사람들의 모임 장소로 삼고, 그들의 발에 묻은 먼지로 몸을 가리고 (항상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말씀을 목마르게 마시라.”
그러나 학생은 스승의 단순한 “고무 도장”이 되거나, 스승의 말을 분별력 없이 흡수하는 “스펀지 유형”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스승은 자신의 삶을 모범으로 하는 제자가 스승의 행동 배후에 있는 원인들을 탐구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교부 아보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현자의 제자는 네 가지 형이 있다. 스승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스펀지 형, 한쪽 끝으로 와인을 빨아들여 다른 쪽 끝으로 내보내는 여과기 형, 와인은 통과시키고 침전물은 걸러내는 여과기 형, 그리고 겨를 걸러내고 고운 가루를 남기는 체 형이다.” 유대인의 교육은 모방을 통한 창의력이 장려되었습니다. 스승은 삶을 통해 신앙을 가르치고, 제자는 스승의 신앙을 본받아서 그것을 자신의 삶에 맞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가르치다”는 고전 희랍어 “디다스코”의 원래 의미는 “증거를 보여 주다,” “실제를 증명하다,” 그리고 “행동으로 실증하다”입니다. 음악에서 디다스코는 성가 지휘자의 임무와 관계되는 단어입니다. 대중 공연을 위해 지휘자의 임무는 성가 대원들을 훈련해야 합니다. 자신의 음악 이론을 실재로 보여주는 것이 디다스코입니다. 연극에 있어서 디다스코는 작품의 줄거리를 창작한 작가와 관계됩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연기자들을 통해 발표합니다. 이때 디다스코는 “시적 활동”을 나타냅니다. 스승의 행동이 가르침의 실질적인 모범인 것입니다.
4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의 이미지는 “활동하는 교사”입니다. 예수님께 가장 일반적으로 주어진 칭호는 “디다스칼로스,” 즉 “선생님”입니다. 4복음서에서 약 48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활동도 동사형인 “디다스코”, 즉 “가르치다”로 나타납니다 (약 50회). 예수님은 종종 회당이라는 공식적인 환경에서 가르치셨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가 가는 곳마다 학생들이 따라다니는 여행하는 교사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야외에서, 바닷가에서, 성전에서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식은 그들과 늘 함께 하면서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 일을 보여 주신것입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인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일하면서 예수님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순히 수동적인 역할로 그와 함께 있지 않고 예수님과 같은 사명과 권능을 공유하는 적극적인 협력자로서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 사실을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낼 열두 제자를 지명하셨고, 또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가지게 하셨다고 밝힙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자신과 동일한 사명을 위해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그들을 초대합니다. 십자가의 길로 행하는 도중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삶으로 제자도를 가르쳤습니다. 살아 있는 모범만이 신앙의 참 가르침이 되는 것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끝까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모범 삼았던 중세의 수도자 토마스 아 캠피스는『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기독교 교육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길이요, 질리요, 생명이다. 길이 없으면 갈 수 없고, 진리가 없으면 알 수 없고, 생명이 없으면 삶이 없다. 나는 네가 따라야 할 길이요, 믿어야 할 진리요, 바라야 할 생명이다. 나는 불멸의 길이요, 오류가 없는 절대 진리요, 영원한 생명이다. 나는 가장 곧은 길이요, 최고 높은 진리요, 참된 생명이요, 축복받은 생명이요,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다. 내 길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여 영생에 이르리라. 네가 내 제자가 되고자 하면 자신을 부인하라. 복된 삶을 소유하고자 하면 현생을 멸시하라. 나와 함께 통치하고자 하면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라. 십자가의 종들만이 참된 빛과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