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진실의 규범”
진리로 번역 되는 희랍어 “알레데이아”는 주로 거짓이나 가짜와 반대되는 용도로 쓰입니다. 호모는 거짓이란 진리가 부재한 상태 혹은 반쪽짜리 진리라고 정의합니다. 누군가 반쪽 진리를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였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을 확대하거나 미화하는 말은 실제로는 거짓입니다. 진리는 주로 대조를 통해서 보여집니다. 그것은 거짓된 진술이나 과대 혹은 과소 평가와 대조적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이루는 여섯 요소를 설명합니다.
첫째, 알레데이아는 “확실성과 힘”입니다. 이 낱말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의심할 수 없는 진실과 확신한 사실입니다. 이 확실성은 조사를 통해서 그리고 경험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알레데이아는 이미 말했던 계시가 실제로 발생했고,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음을 확인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었는데 “그 말씀은 참된 (알레데이아) 말씀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알레데이아는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사회의 유효한 규범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기적인 욕심만 가득하여 진리를 거스르고 옳지 않은 것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진노와 화를 내리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그리스인의 삶과 연관 시켜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진리로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알레데이아는 “신뢰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신뢰성을 강조하기 위해 수사 의문문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납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알레데이아).” 신앙의 사람이라도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참되심과 연결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신뢰성과 알레데이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신들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알레데이아는 “실제 상황”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음모를 꾸미기 위해 헤롯 안티파스와 본디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모인 것이 현재 상황임을 나타나기 위해 누가는 “실제로 (알레데이아)”를 문장 앞에 놓습니다. 이 낱말은 하나님의 계시된 현실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바울은 복음과 관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역시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 진리를 깨닫고 지금도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상황입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내가 나를 거야”라고 생각하고, 그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묻습니다. 여자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에게 실제 발생된 사실 (알레데이아)을 말씀드렸습니다.
넷째, 알레데이아는 “진실된 진술”입니다. 사도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이 실제로 눈으로 그리고 몸으로 체험했던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을 말할 때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흉년이 들었다.”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옳소이다 (알레데이아). 선생님이여, 한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 외에 다른 이가 없으므로 선생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나이다.” 알레데이아는 사람이 하는 진술이 참일 때 사용됩니다.
다섯째, 알레데이아는 “참된 가르침 혹은 믿음”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자기 동맹자나 옹호자나 진영을 구별하지 않고 정의롭게 행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의지하는 삶의 자세를 진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사회와 국가의 기준이 되는 율법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가르침에 따르는 사람을 타락한 자식들에 반대되는 개념인 진리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베드로는 기독교 신앙을 진리로 표현합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깨끗하게 되었니라. 디모데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인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반대 되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복음의 내용을 진리로 표현합니다. 곧 신앙에 관한 그릇된 가르침과 충돌되는 참 가르침이 진리입니다.
여섯째, 알레데이아는 “신성한 실체”입니다. 이 실체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이 실체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도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라고, 인간의 실체를 밝힙니다. 그렇지만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마주할 때 그 말씀에 자신을 항복하기로 결정하는 사람은 진리에 대한 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이 질서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군가가 ‘나는 하나님을 알아요 (진리를 알아요)!’라고 말하면서 그분이 명령하는 것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에게는 알레데이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해야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은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라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진리의 특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진리의 근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진리이신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의지하지 않고는 진리를 알거나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그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진리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