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라”(누가복음 6:27-38)
손동휘 목사 (런던한인교회)
“원수를 사랑하여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어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여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쪽 뺨도 돌려대어라.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 속옷도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그냥 주어라.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용서하여라, 무조건 용서하여라.”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도대체 이게 가능은 한 것입니까? 아니 이것이 가능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용서는 어렵습니다. 아니 지독히도 어렵습니다. 일례로, 어느 마을에 사이가 무척 안좋은 장사꾼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의 가게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 뜨고 밤에 눈 감을 때까지 상대방이 망하기만 바라였습니다. 보다못한 신이 화해를 위해 한 사람에게 천사를 보냅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합니다. “신께서 당신에게 큰 선물을 내리실 것입니다. 재물을 원한다면 재물을, 장수라면 장수, 자녀라면 자녀를 주실 것입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천사가 그 장사꾼에게 말을 이어갑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당신이 미워하는 그 사람은 두 배를 얻을 것입니다. 금화 10개를 원하면 그는 금화 20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웃음을 지은 천사가 계속 말합니다. “자 그러니 이제 화해하시오. 신께서는 그대들에게 교훈을 주시고자 함이오.” 천사의 말을 들은 그 장사꾼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묻습니다. “제가 무엇을 바라든 저 사람에겐 두 배로 들어준다는 것이지요?” 천사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한숨을 크게 쉬고 굳게 결심한 듯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 한쪽 눈을 멀게 해주시기 원합니다.” 용서는 이렇게 어렵습니다. 지독히도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비유를 통해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하고 못난 삶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한 나라에 왕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게로는 200톤으로, 그가 진 빚은 무려 6천만 데나리온이나 되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었기에 그는 쉬지도 않고 무려 십육만 사천 년 동안 일을 해야만 갚을 수 있는 채무를 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제발 용서해달라고 하자,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그의 모든 채무를 용서하여 줍니다. 기쁜 마음으로 왕궁을 나가던 그는 길에서 우연히 동료를 만납니다. 그 동료는 그에게 백 데나리온, 즉 백 일 동안의 노동품삯을 빚졌습니다. 그의 동료는 그에게 엎드려서 제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든 후에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둡니다. 용서는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지독히도 어렵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이토록 자기중심적으로 시궁창 같기 때문입니다.
1948년 10월에 여수 순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애양원 교회의 목회자였던 손양원 목사님의 첫째 아들 동인과 둘째 아들 동신이 빨치산에게 살해를 당하였습니다. 타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목사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10월 27일 아침, 여수 애양원 교회에서 두 아들의 장례예배가 열립니다. 장례예배의 마지막에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답사를 읽었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오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순교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거늘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에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청년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앉았던 식탁에 그들을 죽인 재선을 앉히고 조반을 먹을 때, 내 입 안에는 밥이 아니라 모래알이 삼켜진 듯 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 당했을 때 안재선, 아니 손재선은 상주의 자리를 지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을 깊이 울리는 그리스도인의 용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큰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손양원 목사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신앙의 능력과 실력이 겨자씨 만큼도 없습니다. 저 역시 그분과 같은 손 씨라는 것을 빼고는 그분의 발꿈치에도 신앙이 미치지 못합니다. 이런 분은 정말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성인입니다. 그래서 마치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있는 분 같아서 우리는 산 아래에서 멀찌감치 있는 저 산 정상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감히 거기까지 올라갈 각오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이런 분에 비해 우리는 사소한 용서 하나에도 숨이 벅찹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몰라도 한참은 몰랐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일곱 번 용서하겠다며 칭찬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이냐 사백 구십 번이냐 라는 숫자에 대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너무 부담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곱씹어보면 발견하게 도는 저와 여러분의 실체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그만큼 용서 못한다는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즉 거듭나도 용서는 잘 안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우리의 두 어깨에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 것입니까? 주님은 가능치도 않은 것을 요구하는 심술 궂은 분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심오한 이유가 있습니다. 용서가 잘 안된다는 것을 진실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치를 훌쩍 넘는다는 것입니다. 해보아도 해보아도 도무지 잘 되어지지 않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포자기 한 채 주저앉아 있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주저 앉아 과거의 상처를 핥지만 말고 주님이 주시는 용서를 향해 오늘의 삶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여정입니다. 여정은 과정이고, 계속해서 가야할 길을 걸어가는 움직임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도착지에 내 인생 여정의 좌표를 삼는 것입니다. 분문에서 예수님은 세 번이나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물으십니다. 여기서 칭찬이 헬라어로 “카리스”인데 그것은 칭찬이 아닌 은혜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대가도 조건도 없이 주어지는 것, 그것이 카리스 은혜입니다. 내 속에는 절망 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는 좁쌀만큼의 용서의 능력도, 실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카리스, 주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매일 매 순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만으로 내 삶은 용서의 삶이 되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용서는 여정이기에 그 길의 끝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우리의 넘어짐을 승리로, 우리의 아픔을 기쁨으로, 우리의 실패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그 여정의 끝자락, 그 목적지에 결국에는 도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어제의 아픔과 상처와 갈라짐의 자리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어제 누군가의 가시돋힌 말 때문에 영혼의 한쪽 팔이 잘려나갔으면 잘려나간 팔을 끌어안고 우리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오늘을 계속 걸어나가는 것이 용서입니다. 어제 누군가의 매몰찬 시선으로 영혼의 다리 하나가 부러졌으면 절뚝거리는 걸음일지라도 선물처럼 찾아온 오늘을 뚜벅뚜벅 계속 걸어나가는 것이 용서입니다. 비록 온전한 용서가 까마득히 저 멀리 보이지만, 거기에 우리 믿음의 시선을 고정하고, 우리 삶의 신앙의 여정은 어떤 멈춤도 없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답이 없어도 살아가고, 해결이 안 되어도 걸어가는 것이 용서의 여정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찬송가 545장 1절)
신자의 삶엔 우연이 아닌 섭리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아직은 다 헤아리지 못하는 뜻이 있으셔서 여러분의 삶에 아픔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더이상 그 자리에 주저앉아 상처를 핥으며 머물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말처럼, 바람은 여러분의 인생을 흔들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뿌리를 내리는 나무는 없습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는 법입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께서는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용서를 명령하십니다. 이전에 가 보지도 꿈꿔보지도 못한 곳을 향해서, 여러분을 아프게 했던 바로 그 바람을 타고 주님이 열어주시는 신세계를 향해 항해를 한 번 해보라는 주님의 친절한 초청입니다.
그러니 상처를 붙잡고 핥으며 주저앉아 있지 마십시오. 아픈 모습 그대로, 부러진 모습 그대로, 상처입은 모습 그대로 계속 걸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 닦아주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비록 바람이 불어도 사십시오. 비록 바람이 불어도 뚜벅이처럼 걸어가십시오. 절뚝이는 못난 걸음일지라도 여러분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의 삶을 살아내십시오. 바람이 강할수록 말씀을 나침반 삼고, 성령은 돛대 삼으며, 예수 십자가의 갑판 위에 함께 올라 탄 여러분 인생 여정의 동반자들과 눈을 마주치고 서로 따스한 미소 지으며, 걸어가고 계속 걸어가십시오. 사십시오. 살아내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용서의 삶, 용서의 여정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