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누리는 풍성한 기쁨 Abundant Joy in Prison (빌립보서 1:1-2)
큰빛교회 노희송 목사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삶을 누리는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The mystery of experiencing the abundant life is revealed in Christ.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 갈등, 문제 가운데에서도 빼앗기지 않고 요동치지 않는 풍성함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 풍성함을 누리고 계십니까? 누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생활이 어려워 여유가 없는 분들, 늘 불안하고 마음이 넉넉지 못한 경우, 주택 모기지나 렌드비 그리고 금리 이율의 상승세로 해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젊은이들은 살기가 점점 어려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뿐만이 아닙니다. 여러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 모두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차이점과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풍족함을 누리고 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빌립보서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빌립보서에는 친근한 표현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에 루디아(Lydi)라는 여인을 만납니다(행 16:14). 복음을 받아들인 그녀는 집안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자색 옷감 비즈니스를 하며 자기 집을 소유했던 그녀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녀의 집을 빌립보교회의 모임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유오디아(Euodia), 순두게(Syntyche), 에바브로디도 (Epaphroditus)등 우리가 이름을 익히 잘 아는 빌립보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물질적으로 후원하였음은 물로 헌금 전달 일도 맡아 했습니다. 각별했던 사이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가 쓴 서신서들 중 가장 친근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에 가장 친하고 편한 친구를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친하기에 어려움이나 불평 등을 서슴없이 이야기했겠지요. 그런데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그는 복음 안에서 풍성함, 기쁨, 감사로 충만함을 보여줍니다. 감옥에서 어떻게 그러한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었는가? 그 비결에 대하여 나누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슬픔의 장소가 기쁨의 장소로 바뀝니다. Turning a place of sadness into a place of joy in Christ.
동일한 장소가 슬픔의 장소도 기쁨의 장소도 될 수 있습니다.
“동일한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흐를 때도 있고 슬픔의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 (Sandra Steen)
여러분이 놓여있는 환경, 관계,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질병, 불경기, 결혼 생활의 불화와 갈등, 책임과 희생의 자리, 실수와 허물로 인하여 감당하기에 버거운 자리에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께 모두를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슬픔을 부인하지 않고 대면하여 보십시오. 먼저 슬픔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들이나 기쁨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 슬픔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그저 참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요.
슬픔은 당연한 감정입니다. 예수님도 슬픔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오해하거나 그릇된 기대 혹은 맹목적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경제적, 정치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오히려 예수를 믿기 전 더 나은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도리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더 손해를 보아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두가 형통한다는 복음은 거짓 복음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오히려 슬픔의 장소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복음의 힘이라고 선포합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열아홉 번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그의 기쁨은 고난의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기쁨이 고난과 연결된다는 말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프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목적과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시며 책임져 주실 것이며, 나를 성화시켜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어떠한 상관과 의미가 있는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서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길을 가다 돌을 마주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는 그 돌이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디딤돌이 됩니다. 조개는 진주를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주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 때문입니다. 조개는 입을 벌릴 때 왕모래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게 되어, 그로 해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분비물을 계속 뿜어야만 합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진주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분명 이물질은 위기요 고난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무언가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덕분’으로 여기며 우리도 인고의 노력으로 진주를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때문’은 ‘덕분’ 으로 능히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매임도 자유로 바뀝니다. Turning bondage into freedom in Christ.
분명히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속박되어 있음에도 자유로움을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잘못으로 인하여 감옥에 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회개와 변화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매여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결박하고 있는 요인들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나요? 염려라는 감옥에서 사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한 뇌에 박힌 불확실성 때문에 염려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Uncertainty is ‘at the root’ of all anxiety (Julia DiGangi, August 29th, Fortune)
아버지의 잦은 폭력에 대한 염려, 과한 반응에 대한 염려, 여러 다양한 예측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불안정한 것에 대한, 잦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하는 염려 등에 메여 있지는 않습니까. 환경이나 사람 때문에 혹은 재물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느 것에도 결박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도 과연 자유로울까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자유가 방종이 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을 갈망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이나 다니는 교회에 매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을 스스로 노예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1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원천, 목적, 의미입니다. 무엇에 매여있는가는 무척 중요합니다. 복음에 매이는 것은 축복입니다. 자유입니다. 지구가 중심입니까 아니면 태양이 중심입니까. 태양이 중심인 것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에 두고 매인 채 움직일 때 질서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며 뿌리요 원천이 되는 삶을 살아내십시오. 자신이 중심이 되어 교회 생활이나 종교 생활을 한다면 중심과 동떨어진 삶입니다.
세상의 것이나 욕망, 걱정이 중심이 된다면 삶의 원천인 풍성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감옥 안에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 분이 자유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절)
여러분의 원천은 과연 무엇이며 누구입니까. 슬픔이 기쁨으로, 매임이 자유로 바뀌는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삶은 어디서 오는지를 알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원천이 되는 삶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When Jesus becomes the source of our lives everything chan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