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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빌라도의 선택(요 18:28-19:16)_박원철 목사 (토론토늘사랑교회)

빌라도의 선택(요 18:28-19:16)

박원철 목사 (토론토늘사랑교회)

    빌라도는 로마 제국이 파견한 다섯 번째 유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A.D. 26-36 사이에 유대 총독으로 재직하였습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가면 ‘빌라도의 보고서’(A Report of Pilate)라는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에는 빌라도가 겪은 정치적인 갈등과 문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 재판 과정과 처형,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이 그렇게 선동적이거나 반항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의 위엄있는 모습에 압도되어 자신은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두려움으로 온 몸이 떨렸고, 예수님의 교훈은 단순하면서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설교보다 더 힘이 있고 장엄했다고 빌라도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는 유대 군중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높이 믿으면서 따랐는지를 언급하면서, 로마 제국도 결국은 예수 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재판 할 때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그를 풀어주기 위해 무척 애를 썼으나 유대 군중들의 폭동이 예상되어 어쩔 수 없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는 빌라도의 솔직한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이 보고서의 말미에는 빌라도가 그의 부관을 통해 예수가 부활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했다는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진실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빌라도는 요한복음 18장 38절, 19장 4절, 6절에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는 고백을 3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빌라도는 양심에 근거한 정직한 고백을 하고 있고, 나름대로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신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책임을 물으면서 인류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그를 죄인 중의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빌라도 보다 훨씬 더 책임이 큰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가룟 유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헤롯 안티파스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있어서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크면 컸지 결코 작지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도 요한복음 19장 11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주었던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의 사위인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 그리고 가룟 유다, 헤롯 안티바스, 하인들, 로마 군인들, 군중들의 죄는 빌라도의 죄 보다 더 크다고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직접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심판은 그 어떤 죄인들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더 큰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빌라도는 이런 엄청난 역사적 책임을 져야만 했을까요? 도대체 빌라도의 잘못은 무엇인가요?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에서 파견한 유대 총독의 허가가 있어야만 사형을 집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는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면 현장에서 바로 돌로 쳐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레24:16).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고 더럽히는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온 회중들이 공개적으로 돌로 쳐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더 크고 먼저 존재하였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자 흥분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해 빠져 나가셨습니다(요8:59).

   아무튼 이런 유대인의 율법에 근거하여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든지 이방인이든지 무론하고 성전을 더럽히고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는 로마가 파견한 유대 총독의 허가가 없더라도 종교법에 따라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는 예수님에게서 신성모독죄의 증거를 찾으려고 심문을 하였지만 특별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죽인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종교적인 논쟁이 일어날 수가 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신성모독죄를 적용하여 죽이기로 합의하였지만 외부적으로는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죽이기로 공모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스스로 왕이라고 했다고”라는 누명을 씌워 로마 당국에 고발을 하게 됩니다.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저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요18:28)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문을 통해서도,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재판을 통해서도 사형을 집행할만한 뚜렷한 근거를 만들지 못한 제사장과 바리새인 세력은 새벽에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저로 데리고 가서 예수님을 로마 제국의 반역자로 고소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그의 관저 안으로 들어 갑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 중에는 이방인과의 접촉을 피해야만 하기 때문에 관저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서두에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반역죄에 해당하는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7장 19절에 보면, 빌라도가 재판을 시작하려는 직전에 아내가 급하게 사람을 보내어 간 밤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죄없는 예수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마27:19)

    사실 그 당시 빌라도는 이러한 아내의 충고를 결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원래 빌라도는 상류계급 출신의 사람이 아니라 중류계급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로마의 상류층 황실에 속한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클라우디아 프로큘라” 이것이 빌라도 총독 아내의 본명입니다. 이 여인은 티베리우스(디베료) 황제의 세번째 아내인 클라우디아의 딸이며,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줄리어스 시저의 양아들) 황제의 손녀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어떤 인연 가운데서 그녀가 빌라도와 친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하여 결혼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간에 빌라도는 이 황실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서 마침내 귀족 계급의 서열에 올라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후 26년에 그는 드디어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게 됩니다. 이 때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광야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이며, 예수님은 공생애를 막 시작하려고 할 즈음입니다. 그러다가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 된 지 4년 후에 그는 예수님을 재판하는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빌라도는 자기 아내의 말을 무시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아내의 감정을 잘못 건드린다든지 하면, 바로 로마 황실에 자기의 정보가 불리하게 보고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빌라도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다소 약자의 입장에 처해 있었으므로 아내의 말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양심이 예수님은 무죄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또한 그 당시 유대 민중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지금 예수님의 처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그의 총독 재임 시작부터 유대의 군중들과 여러 가지로 대립 관계와 갈등 관계를 만들어 왔습니다.

    우선 그는 취임 초기에 로마 황제 숭배를 유대인들에게 강요하다가 민중들의 시위와 폭동으로 인해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빠졌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얼마 후에 자신이 다스리고 있던 지중해 해안 도시 가이사랴에 수문(운하)을 건축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무리하게 세금을 징수하다가 다시 유대 민중들의 폭동을 맞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빌라도 총독이 정치를 별로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로마 황제 티베료에게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다시 한번 더 유대 민중들의 비위를 거스렸다가는 빌라도 총독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난처한 지경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빌라도를 향해 유대의 민중들은 이렇게 위협하였습니다.“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요19:12) 예수는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자인데, 이런 자를 무죄 석방하면 그것은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라고 빌라도를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빌라도는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지금 빌라도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유대 군중의 요구를 따르자니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롭고, 아내의 경고를 따르자니 군중들의 폭동이 두렵고, 이렇게 예수님을 죽일 수도, 안 죽일 수도 없는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8-19장에 나오는 빌라도의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통해서 빌라도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요18:29)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18:33) 여기서 29절의 “밖으로 나가서”라는 표현과 33절의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라는 표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 “나가서. . . 들어가서. . . 다시 나가서. . .”  지금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들락날락 하고 있는 빌라도 총독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19:4) 안절부절하면서 들락날락하는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군중들에게 자꾸만 시사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빌라도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무죄 석방하려고 시도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요19:9)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 .”(요19:13) 빌라도는 지금 계속해서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쩔 줄을 몰라서 당황해하며 안절부절하고 있는 빌라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라는 유대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양심을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총독으로서 그는 지금 예수님을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 하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빌라도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빌라도는 사실 예수님에게서 어떠한 정치적인 죄목도 발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냥 예수님을 풀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예수님을 심판하라고 소리치니 그냥 놓아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다시 말해, 실리와 명분을 다 챙기려고 하였습니다. 공의도 세우고 민심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고 물었던 빌라도의 말을 좀더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밥먹여 주냐”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세상적인 출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진리와 공의보다는 사람들의 여론과 정치적인 이익에 더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실리와 명분을 둘 다 챙기기 위해 잔머리를 굴려 “유월절에는 유대의 전통에 따라 죄인 중 한 사람을 특사로 풀어주는 전례가 있으니 예수님과 바라바 중 한 사람을 풀어 줄테니 누구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요18:39). 그러자 군중들은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요18:40)

    바라바는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 정치적인 강도였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제국에 대항할 목적을 가지고 친로마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을 공격하여 강도질을 하는 그런 일종의 테레리스트요 반란군. 즉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선동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 대신 강도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빌라도의 예상과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나왔습니다. 군중들의 반응에 당황한 빌라도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채찍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더라.”(요19:1)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최종 재판이 끝나고 십자가 형을 당하시기 전에 채찍에 맞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막15:15)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최종 재판을 받기 전에, 다시 말해, 심문을 받으면서 채찍에 맞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종합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적어도 두 번 이상의 채찍질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단지 채찍질의 강도가 틀렸을 뿐입니다.

    그 당시 로마 법에 의해 행해지는 채찍질에는 강도에 따라 세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푸스티가치오(fustigatio), 플라겔라치오(flagellatio), 그리고 베르베라치오(verberatio) 입니다. 푸스티가치오는 가장 강도가 낮은 채찍질로 어떤 문제를 일으켜 단순히 경고와 벌칙이 필요한 경우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강도가 놓은 베르베라치오는 십자가 형을 당하는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당하기 전에 맞는 채찍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가한 채찍질은 가장 강도가 낮은 푸르티가치오 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에 맞은 채찍질은 가장 강도가 높은 베르베라치오 입니다. 이렇게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 한 후에 예수님을 군중들 앞으로 데리고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으로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요19:4-5)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옷을 입은 채 채찍에 맞아 피범벅이 된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온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또 다시 빌라도의 기대를 저버리고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 칩니다. 그러자 군중들의 고집에 화가 난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으니 십자가에 못 박고 싶으면 너희들이 데리고 가서 직접 못 박아라”(요19:6)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사형하도록 군중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요19:16)

    결국 빌라도가 택한 최후의 선택은 자신은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자신은 최후의 판결을 하지 않고 군중들로 하여금 선택하고 판결하도록 비겁하게 책임을 군중들에게 떠넘긴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폭도들에게 넘기면서 빌라도는 자기 손을 대야에 넣고 씻으면서 “나는 이 무죄한 피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27:24) 

    우리는 예수님을 재판하는 이런 빌라도의 모습을 통해 그의 분명한 잘못 두 가지를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진실을 외면한 죄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눅23:20-24)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라는 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빌라도는 유대 군중들의 강렬한 요구와 시위에 굴복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의 어리석은 소리에 굴복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4절에서는 유대군중이 민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고, 마가복음 15장 15절에서는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의 공통점은 빌라도가 성난 군중들의 시위가 두려워서 죄없는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이끌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빌라도는 올바른 판단력과 바른 양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저버리고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고 생각한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우매한 군중들에게 떠밀려 잘못된 선택을 하였습니다. 

    옳은 것에 대한, 다시 말해, 진실과 진리에 대한 용기있는 선택이 없다면 그 인생은 헛된 것입니다. 만약 빌라도가 모든 위협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리와 양심의 길을 선택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빌라도가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다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황제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고, 정치적으로 무능한 사람으로 평가받아 정치적인 출세의 길이 막혀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성난 군중들이 일으킨 폭동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사람으로 영원히 남았을 것입니다. 역사가 끝날 때까지 진리를 위해,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위대한 순교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기록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는 고난을 받으사”라는 모습으로 영원한 생명책에 영광스럽게 기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걸쳐 쌓아놓은 세상적인 부과 명예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난 군중들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진리와 양심을 버리고 죄 없는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빌라도는 하나님 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찬 유대 군중들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습니다. 다시 말해, 불의와 타협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빌라도의 자리에 서 있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사실 똑같은 상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 당하는 여자를 도와주다가 소매티기가 휘두르는 칼로 얼굴에 크게 상처 입은 교회 자매의 이야기처럼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아무런 죄도 없이 고난 받고 있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을 지켜주다가는 내가 피해를 당할수 있는 상황, 심지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에 서게 되는 때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따를 것인가, 현실을 따를 것인가?”하는 것은 결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하게 선택해야 할 일은 “세상의 유혹이나 위협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의로운 길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죄없는 사람 하나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걸어야 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빌라도와 똑같은 선택을 한다면 역사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쩌면 역사의 심판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어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진리와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용기”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해야 할 참된 길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사람, 진리와 양심을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빌라도의 두번째 잘못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 죄입니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많을수록 그 결정들에 대한 책임도 많아집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무언가를 결정해 나가는 것 하나 하나가 얼마나 큰 부담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그 책임은 고스란히 다 결정권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특별히 역사는 올바른 결정을 선택한 사람과 현실에 안주하려는 선택을 내린 사람과의 차이를 냉엄하게 심판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성난 군중들에게 내어주기 직전에 그는 유대 군중 앞에서 물을 떠서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 아주 고도의 책임회피입니다. 그렇게 빌라도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고, 군중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죽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하며 받았습니다. 빌라도와 유대 군중들은 자기들끼리 죄의 책임을 서로 주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렇게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지만, 실상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님을 죽인 죄에 대한 책임을 문책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판을 맡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빌라도의 고민과 고뇌를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마27:22) 이것이 빌라도의 고민이요 번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현실의 안락과 풍요를 포기할 수 없어서 진리를 외면하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비겁자의 자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빌라도의 자리에 선다면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요? “내가 그리스도라 하는 이 예수를 어떻게 하랴?”

    진리를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였던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사실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를 거절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만 원하시면 얼마든지 십자가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선택하였습니다. 온 인류를 위하여,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또한 인간의 역사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앞에 선 빌라도는 아무것도 안 하기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성난 군중들의 피묻은 손에 내어 주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영원히 문책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빌라도의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중요한 선택의 질문을 하십니다.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어떻게 하랴?”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은 이 질문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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