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광합성”/ 시1:1-3
에드먼턴 임마누엘교회 임재택 목사
엔트로피의 법칙은 무질서 정도에 대한 척도를 말하는데 우주에 시간이 더해져 갈수록 질서있는 상태에서 점점 무질서한 상태로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과학법칙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주에서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 있다. 그것은 빛으로 인한 광합성이다. 이것은 생명 순환의 시작이 된다고 과학자들 특히 생물학자들은 “생명과 열역학 법칙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미 하나님은 빛을 먼저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죽음에서 살려내고 무질서로부터 질서롭게 하는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인간들도 싱싱하게 살아가려면 빛되신 말씀과 함께 영혼의 광합성을 해야한다.
특별히 오늘 읽은 본문은 인간중에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인정되는 다윗의 고백이다.
다윗은 자기 평생에 행복한 인간에 대한 묵상과 고민 끝에 탄성처럼 터져나오는 고백을 노래로 부른다. 시편 1편에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참된 행복의 원리에 대해서 알아보자.
- 행복한 나무, 행복한 사람/ 3절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다윗은 행복한 사람의 삶을 좋은 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왕으로서 당시 세상의 최고의 것을 누려보았던 다윗이 비교하며 말하는 행복한 기쁨의 고백은 시편 4편 7절에 나온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빛이 비추어 질 때 무엇인가 하나되고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이광진 물리학 교수는(진격의 물리학 저자, 미국 로체스터대학교 광학연구소 박사)
“플라즈몬”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금속에 빛을 비추면 빛과 전자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데 이 상태를 “준입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빛과 전자들이 서로 반응하면서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춤을 추면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에 빛이 비추이면 빛과 물질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행복할 때 춤을 춘다. 그와 같은 원리가 물질에 빛이 비추일 때라는 것이다.
“플라즈몬 현상”을 정리하면
- 빛과 물질이 한 몸처럼 되는 상태
- 광자와 전자가 춤을 추는 것 처럼 활동하는 상태
어두운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진리와 빛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닿으면 그 말씀과 우리는 하나가 되는 역사, 또한 그 진리의 성령과 하나가 되어 함께 춤을 추는 가장 행복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 에드먼턴 임마누엘 교회 성도들은 거룩한 준입자, 거룩한 플라즈몬의 삶을 살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내 영혼의 광합성/ 2절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며는 “내 영혼의 광합성”은 밤낮으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 교회들이 요즈음 왜 욕을 들어 먹고 성도들조차 싱싱하지 못해서 사회와 가정에서 어려운 삶을 사는가 하는 원인도 여기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내 영혼의 광합성”이 부족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 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서 말씀 듣고 사는 것 말고 매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 즉, “주, 야로 묵상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 할 때 “글쎄요”가 90%이다.
내 영혼의 광합성을 위해서 우리는 우선 초점을 “주, 야로 묵상”, “날마다”에 두어야 한다. 시편68편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 할지로다” 하셨다.
일 주일에 한 번씩도 아니고 사흘 건너 한 번씩도 아니다. “날마다”이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신사적인 교회이면서 수준 있는 교회의 모델로 언급하고 있는 베뢰아 교회의 경우도 “날마다” 성경을 묵상했다고 한다. 사도행전 17장11절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돈이 많고 똑똑해 보이고 또 신앙생활을 오래 했거나 직분이 있고 또 사회적으로 좋은 자리에 있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눈을 감고 영적으로 그 사람을 생각해 보면 왠지 시들시들한 영혼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영혼의 광합성”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만 알겠지만 원리가 그렇다.
역사적으로 “어두운 시대”라고 부르는 때가 있었다.
말씀을 신부들만 아는 라틴어로 설교하고 성도들에게는 성경을 주지도 않았던 중세다.
성경을 각국의 자기 언어로 번역했던 것은 종교개혁 시대를 맞아서야 겨우 했으니까 그 이전에는 성도들이 말씀의 빛으로 광합성을 하고 싶어도 못했던 시기였다.
감사하게도 성령께서는 목숨을 건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 빛되신 말씀을 번역하게 하셨고 성도들로 하여금 살아나게 하셨다.
징그러운 그리스도인이 있고 싱그러운 그리스도인이 있다.
날마다 내 영혼의 광합성을 왕성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싱그러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 임마누엘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 뒤로 한 번 인사 나눕시다.
징그러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싱그러운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누구든지 행복할 가능성/ 1절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빛으로 내 영혼의 광합성을 하는 은혜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
본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아쉬레이 하이쉬’이다.
직역하면 ‘그 사람의 복이여’이다.
‘븍’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는 ‘바라크’과 ‘아솨르’이 있다.
여기서는 ‘아솨르’로 거의 복수 연계형인 ‘아쉬례이’으로 사용되었는뎨 이 ‘아솨르’는 대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에 대하여 인간이 고백 혹은 기원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는 원래 남성을 뜻하는 단어이다(창 2:23).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인간을 가리키고 있는 바 모든 인간들을 의미한다. 여성이나 아이도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말이다.(Luther 주해)
특히 사람이란 단어는 그 앞에 정관사 ‘하’(the)가 붙은 단수인 반면에 복이란 단어는 복수임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누구든지 야훼의 율법에 따라 사는 그 사람은 여러 형태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복을 기원하는 큰 탄성으로 시편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열면서 그러한 복을 누릴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구약 지혜 문학의 첫 권인 시편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선언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있다.
예수님은 이 복을 누릴자는 “모두”에게, “누구든지”에 있다고 하셨다.
마태복음 5장19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고 요한복음 7장 37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다.
광합성 연구에 관한 역사를 조금 살펴보고 마치기를 원한다.
프리스틀리는 영국에서 태어난 화학자이자 목회자였다. 1772년, 그는 실험을 통해서 식물과 동물이 함께 있을 때 생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발표하게 된다.
- 밀폐된 유리병 속에 쥐만 두면 죽는다.
- 밀폐된 유리병 속에 식물만 두어도 죽는다
- 밀폐된 유리병 속에 식물과 쥐를 함께 두었더니 살더라.
결국 생존에 필요한 기체 즉 산소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7년 후에 네델란드에서 1779년, 잉겐호우스는 보완 실험을 한다. 앞에서 실행했던 프리스틀리의 실험 조건에 빛의 변화를 주었다. 밀폐된 유리병 속에 아무리 동물과 식물이 같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쥐가 죽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반면에 빛을 쪼이면 식물도 동물도 함께 계속 산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 후에도 광합성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 오늘날과 같은 복잡 다단한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 기본적인 결과는 변하지 않고 있다.
생명의 존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빛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의 소식을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추인 소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과연 3500년 전에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이런 엔트로피의 감소 법칙을 알았을까?
빛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고 인위적으로, 의도적으로 빛을 가장 먼저 기록했을까?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사도 요한은 빛의 중요성을 알고 “말씀이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 이름은 예수”라고 했을까?
인간중의 인간인, 다윗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경험하고 내리는 결론이 빛되신 말씀을 밤과 낮으로 묵상하면 그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 같은 풍성한 삶, 형통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한 것은 우연일까?
사도 요한의 선언을 읽고 마치자. 빛이 곧 말씀이고 말씀이 곧 빛이다.
예수님은 어두운 이 땅에 살리려고 오신 생명의 빛이다. 믿는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영혼의 광합성”을 하는 사람은 싱싱한 인간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 줄로 믿는다.
요한 복음 1장 1절에서 13절 말씀이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빛”이라고 직접 표현하셨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엔트로피의 법칙은 과학 법칙이지만 이를 사회와 국가 현상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고 1921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소디가 말했다. “모든 정치체제의 흥망성쇠, 국가의 자유와 속박, 상업과 산업의 동향, 가난과 부의 근본, 그리고 모든 종족의 복지까지도 관장한다”고 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뿐 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사회 국가도 풍성한 삶의 비밀은 빛되신 말씀, 이 땅에 오신 예수에게 있다.
이 번 한 주간, 빛 되신 말씀을 날마다 주, 야로 묵상함으로 싱싱하게 살아내는 한 주 또한 남은 생애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