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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서로 다른 기준, 그러나 같은 방향_로마서 14:1–6/밴쿠버한인연합교회 노은성 목사

서로 다른 기준, 그러나 같은 방향 로마서 14:1–6

밴쿠버한인연합교회 노은성 목사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두고 몸이 약하다고 말할 때는 보통 체력이 약하다는 뜻입니다. 조금만 걸어도 쉽게 지치고 오래 서 있는 것도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몸이 약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몸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저보다 훨씬 큰 사람도 실제로는 저보다 더 약할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이 약하다고 할 때는 쉽게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압박이나 스트레스가 오면 금방 무너지고 긴장되는 상황을 피하려 하며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마음이 약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종종 성격과 믿음을 혼동합니다.

결정을 빨리 내리는 것은 성격의 문제인데 그것을 믿음의 문제로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을 보면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가볍고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고 상황을 더 정확히 보려는 성격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이미 주어진 자유를 아직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배경을 조금 설명드리겠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는 국가가 주관하는 제사가 많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신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나라가 평안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정기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린 후 남은 고기 일부는 제사를 집례한 사람이 가져가고 또 일부는 참여자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고기는 시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로마 신들에게 바쳐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이 때문에 로마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갈등을 겪었습니다. 로마 신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사서 먹는 것은 마치 그 신을 예배하는 일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장에서 고기를 사 먹지 않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으로 인해 변화되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더 큰 믿음 위에 서기보다 여전히 음식 문제에 마음이 묶여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먹어도 괜찮았지만 그 문제를 넘어가지 못하고 훨씬 더 크게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 약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잘못이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자라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채소만 먹는 사람들을 보며 “왜 자유를 누리지 못할까?” “아직도 그런 것에 묶여 있나?”라고 말하며 그들의 양심과 생각을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채소만 먹던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아무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믿는 사람이 저렇게 행동해도 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이 나뉘고 서로 불편해지며 결국 관계가 왜곡됩니다.

여러분, 폭설이 오면 공항이 마비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비행기가 취소되거나 지연되고 승객들이 공항에 발이 묶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단순히 눈이 많이 와서가 아닙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날개에 생기는 얼음 때문입니다. 원래 비행기 날개는 공기가 부드럽게 흐르도록 매우 매끄럽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양력이 생겨 비행기를 위로 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이 내리고 기온이 내려가면 날개 표면에 얇은 얼음층이 생깁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얇은 얼음층만으로도 날개 표면이 거칠어지고 공기의 흐름이 깨지며 양력이 크게 감소합니다. 실제로 아주 얇은 얼음층만 있어도 비행 성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공사들은 이륙 전에 반드시 이 얼음을 제거합니다. 이것을 디아이싱(de-icing)이라고 합니다. 특수 장비로 뜨거운 제빙액을 날개와 기체에 뿌려 얼음을 녹이고 다시 얼지 않도록 보호 코팅을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장비와 차량이 매우 비싸고 작업에도 시간이 걸립니다. 모든 비행기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도 없습니다.

또 지정된 장소에서만 작업할 수 있기 때문에 비행기 이동 시간도 길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이 겹치면서 비행은 연쇄적으로 지연되고 결국 승객들은 공항에 갇히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날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큰 고장이나 심각한 파손만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얇은 얼음층도 비행기를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작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공기의 흐름을 막고 결국 비행기를 날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심각한 문제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은 판단들이 계속 쌓이면 관계를 거칠게 만들고 서로를 향한 마음의 흐름을 막아버립니다.

판단이 마음에 계속 쌓이면 우리는 더 이상 상대를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없게 됩니다. 무슨 말을 해도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됩니다. 선한 의도로 한 행동도 부정적으로 해석되고 작은 실수는 더 크게 보이며 진심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비행기 날개에 얼음이 끼면 제대로 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람 사이에도 판단이 계속 쌓이면 관계는 건강하게 자라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이유는 우리가 악해서가 아닙니다.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추우면 얼음이 생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판단하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왜 내가 판단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왜 저 사람의 행동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판단의 문제는 먼저 다른 사람에게 향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점검해야 할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판단이 마음에 쌓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점점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하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서도, 판단한 후에 오는 죄책감에서도 자유롭게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하려는 마음 자체가 없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상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이해할 의도가 없다면 당연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여야 이해됩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른이 되어 보면 인생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건강할 때는 아픈 사람의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직접 병을 겪고 나면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이해는 이론만으로 배우기 어렵고 시간과 경험 속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하려는 마음도 있고 경험도 있으며 충분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특별히 5절과 6절은 그런 것들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거룩하게 여기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깁니다. 특정한 날을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을 구별해 하나님께 집중하고 세상의 일보다 하나님을 먼저 두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마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다 보면 하나님을 놓치기 쉽다. 그러므로 적어도 어떤 날만큼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그날에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한다.” 그래서 교회 역사 속에는 특정한 날을 정해 금식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면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사람은 특별한 하루를 드리는 것보다 삶 전체를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왜 하루만 주님의 날인가? 내가 일하는 날도 주님의 날이고 쉬는 날도 주님의 날이다. 믿음은 특정한 날에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여러분, 이런 경우에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정한 날을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사람이 영적으로 느슨해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무 구별 없이 살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특정한 날을 구별하는 사람이 형식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맥킨타이어(MacIntyre)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을 ‘비교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제 이야기를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결혼 후 저와 아내는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닮아갔습니다. 아내는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고 저도 아내가 좋아하던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순댓국을 좋아하지만 아내는 원래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는 함께 즐겁게 순댓국을 먹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저는 피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피자를 좋아하는 아내와 자주 먹다 보니 저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0년 넘게 함께 살아도 여전히 같아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 방식이 다릅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 줄을 긋고 여백에 메모를 합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책은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화가에게 붓이 있고 목자에게 지팡이가 있듯 저는 책을 도구로 생각합니다.

반면 아내는 책을 아주 깨끗하게 봅니다. 책을 펼쳐 보면 읽은 책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입니다. 줄 하나 그어진 곳이 없습니다. 아내는 책을 소중한 것으로 대합니다.

우리는 책을 대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저에게 책은 도구이기 때문에 줄을 긋고 메모를 합니다. 아내에게 책은 소중히 다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끗하게 보관합니다.

국을 끓이는 방식도 다릅니다. 저는 냄비에 어느 정도 여유 공간이 있는 것이 편합니다. 넘치지 않고 안정적으로 끓는 것을 좋아합니다. 반면 아내는 거의 넘칠 정도로 가득 채워 끓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내가 국을 끓일 때는 너무 자세히 보지 않으려 합니다. 아내는 제가 왜 불편해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단순히 요리 방식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저는 여유와 공간을 중요하게 여기고 아내는 풍성함과 가득함,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의 기준이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산다고 해서 그 기준이 완전히 같아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교 불가능성입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완전히 하나로 맞춰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기준과 생각이 같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어떤 날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도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는 사람을 보지 말고 주님을 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마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고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보통 “저 사람이 문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갈등은 사람 자체보다 기준의 차이에서 더 자주 발생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계속 상대를 설득하려 하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실망하며 관계는 반복해서 무너집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상처받는 일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기준이 다르더라도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우리 모두를 조화롭게 하나로 묶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준이 다르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알맞게 맞추어 가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판단하는 마음은 비행기 날개의 얼음과 같습니다. 아주 작은 판단이라도 계속 쌓이면 관계를 거칠게 만들고 서로를 향한 마음의 흐름을 막습니다. 그러므로 판단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왜 내가 판단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돌아봐야 합니다.

둘째,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이유도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준이 다르더라도 우리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를 조화롭게 하나로 묶어 가고 계심을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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