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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우리 안에 있는 가룟 유다를 어떻게 할까요?”정윤달 목사(밴쿠버성산교회)

우리 안에 있는 가룟 유다를 어떻게 할까요?(눅6.12-16)

밴쿠버성산교회 정윤달 목사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어디를 가든 나와 갈등 을 일으킬 뿐 아니라 함께 지내는 것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꼭 한두 명쯤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일을 겪을때 나도 성격이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때론 누가 봐도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도 분명히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매사 부정적인 사람, 끝에 가면 말을 바꾸는 사람, 게으른 사람, 인색한 사람,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우리의 마 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말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썩은 사과는 내버리던지 아니면 혹은 썩은 부위만이라도 싹 잘라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생각대로 그렇게 쉽게 처 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일을 처리하는 곳이 많습니까? 의외로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당장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렇지 못해서 끙끙거 리며그냥그문제를안고지내는경우가허다 합니다. 필요악처럼 그 사람이 없으면 도리어 불편하거나 내가 더 고생하기 때문에, 직장에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렇게 끌어안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더 고민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사람을제거할수있을까?

가룟 유다가 그런 사람처럼 보입니다. <없었으 면 좋았을텐데…> 예수님도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으셨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가룟 유다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1. 12명의 사도를 기도 가운데 선택하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에 열두 제자를 선택하십니다. 자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12명의 제자들을 따로 뽑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을 <사도>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내다, 파견하다”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사도라는 것은 “보냄을 받는 자” 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단어로 표현하면 “특사나 사절(envoy)”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일을 맡은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이 12지파로 세워진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시작될 교회을 상징하는 것으로 12명의 제자들을 통해 세워질 것을 미리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를 아무렇게나 선택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고 기도하신 후에 결정한 12명의 이름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 도들입니다. 그런데 이 열 두명의 제자들 이름을 읽다보면 순간 당황하게 됩니다. 16절에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신중한 기도 뒤에 선택된 사도였습니다. 너무 놀랍고 이상하지 않나요!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자라는 것은 전혀 모르시고 선택하신 것인가요? 아니면 알면서도 사도로 선택하셨던 것인가요?

만약에 예수님이 이 사실을 모르고 선택하셨다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의 신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것도 모르고 실수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분명 예수님은 처음부터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있습니다.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하시니(요13:21)>

그런데 이상한것은 예수님이 그 많고 많은 제자들중의 가룟 유다를 사도 그룹에 참여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가룟 유다의 배신 사실을 안 제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어떤 식으로 불만을 드러냅니까? 가룟 유다에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냥 가룟 유다 가아니라“예수를 파는자 될”가룟 유다로 이름을 넣습니다.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당장 이라고 빼고 싶은 이름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않으면 사도들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와 있는 것 자체가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룟 유다는 사도 그룹에 참여시켰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라 고 한다면,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을 선택하고, 완벽한 공동체를 세워서, 완벽하게 일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예수님은 이와 반대로 문제가 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참여시킵니다. 정말 좋은 사람들만 모여서 교회를 이루어가고 싶은 우리들에게 찬물을 던지는 기분입니다. 예수님은 왜 가룟유다를 굳이 이 사도 그룹에 참여시켰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12명을 선택하실 때, 나머지 제자들도 전부 예수님의 마음에 쏙들 정도로 완벽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알고 보면 전부 자기 나름대로 한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고 부족한 모습이 참 많았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아무 때나 불쑥불쑥 나서는 사람이고, 요한은 과격한 성격이어서 형제 야고보와 더불어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칭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때 정치적으로 한 자리를 하고 싶어서 은밀하게 예수님에게 간청하던 정치적 야망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도마는 까칠한 성격으로 매사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면 남의 말을 잘 안 믿는 성격이었습니다.

이렇게 들여다보면 제자들 가운데 사도로서 정말 좋은 성품과 자질을 갖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가룟 유다나 나머지 제자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그렇지, 어떻게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과 그렇 게 비교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래도 배려의 대상, 좀 기다려주면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했기에 배려와 인내가 아닌 처음부터 퇴출 시켜야 하는 대상입니다. 교회의 암적인 존재는 수술을 통해 제거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굳이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도하신 후에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왜 이런 일을 하신 것일까요?

2. 열린 공동체

예수님이 이 배신자 가룟유다도 사도 그룹에 참여시킨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신실한 제자들뿐만 아니라 저 가룟 유다같은 사람들에게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같은 인물에게도 기회를 주어서 교회를 세우고 구원 역사를 성취하는 도구 가 될 수 있음을 처음부터 보여줍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 했습니다. 이런 자부심은 자기 외에 그 어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배타 적인 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기록한 레위기를 읽어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정결함과 제사에 대해 본토인뿐 아니라 거류민, 즉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순종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사는 이방인들도 그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고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열방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실 때 부터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포함 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출애굽할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하셨음을 시내산에서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요나처럼, 이 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긍휼을 상실한자로 취급 해버렸습니다. 자신에 의한, 자신만을 위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과 달리 예수님은 처음부터 가룟 유다, 세리와 창녀, 세상에 손가락질받는 사람들 도 데리고 들어와서 이 사람들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랑해주어도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 하고 제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또 사도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밖에 없는 악한 일을 하는 자를 데리고 있는 것은 누가봐도 소모적이고 불편하며 괴로운 일입니다. 결국은 배신하여 떠날 사람을 사랑한다는것은 상처만 받는 일이 될 것은 너무나 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요13:1)>하심 으로 가룟 유다 까지도 사랑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들, 함께 신앙생활하기에 성품이 좋은 사람들로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은혜가 주어지도록 열린 공간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과 기회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날 뿐 아니라 자살로 비극을 맞이 할지라도 예수님의 은혜는 그런 사람에게도 주어지고 있음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인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사람을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이 버리고, 손가락질하고, 더 이상 쓸모가 없고, 너무나도 분명한 결과를 보여줌에도 불구 하고 교회가 이들에게 열려있으며 은혜의 기회를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세상과 확연히 구별시켜주는 일이 됩니다. 교회의 위대함을 세상에 드러나게 합니다. 가룟 유다도 품는 교회! 생각해보셨습니까?

사도 바울도 가룟 유다처럼 한때 교회를 핍박 하던 아주 악한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을 예수님이 품고 교회가 받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 났습니까? 이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 세계선교와 교회를 위해 섬긴 일은 실로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품고 시작할 수 있는 교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와 섬김과 사역의 기회가 주어지는 교회가 예상치 못한 일들을 이루는 특별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3. 헌신의 순수성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선택하시고 제자들의 공동체에 머물게 하신 두 번째 이유는 제자들의 헌신의 순수성을 보기 위함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혹은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대해 허용 해주실 때 이상하게 그것을 마치 죄를 지어도 되는 것처럼 판단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를 선택하실 때, 당장 드는 생각이 이것입니다. 왜 악한 자가 교회에 와서 죄를 짓고 함부로 행동 하도록 내버려두시는가?

탄산음료를 너무 좋아하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평소에 엄마가 아예 먹지 못하도록 단단히 교육 시켜서 교회에서도 먹지 않도록 늘 주의를 주었습니다.

한번은 여름 성경학교를 하면서 더운 날씨에 학생들에게 먹을 수 있도록 집사님들이 아이스박스를 가져다가 콜라와 사이다를 가득 넣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본 아이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흥분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먹고 싶은 마음에 계속해서 아이스박스 주변 맴돌면서 슬쩍 슬쩍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어보며 구경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아이의 행동에 주변 사람들이나 엄마가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모른척 하는 것인지는알수 없지만 전혀 이 아이를 제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아이가 슬그머니 뚜껑을 열고는 캔을 꺼내서 만지작 거리다가 주위를 돌아봅니다. 이렇게해도 주변 사람들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마치 먹어도 된다는 사인을 받은 것처럼 순간 팝을 따서 한 모금 쭉 들이킵니다.

이 아이가 이런 행동을 할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 어떤 말을 듣지 못하자, 마치 무슨 소리로 착각 했을까요? <그것을 먹어도 돼>

과연 이런 침묵이 그것을 허용하는 싸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 리는 이 아이처럼 그런 생각과 판단으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시킬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지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지어도 되는 것처럼, 죄에 대하여 문제가 없는 것처럼, 슬쩍 넘어갈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의 길을 걸어 갈 때, 그가 마음껏 죄를 짓도록 방치 하고 묵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침묵을 죄의 방조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사도 그룹 속에 두신 이유는 가룟 유다를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는 일종의 빨간 경고등입니다. 헌신의 순수성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도전이었습니다.

사도 중의 한 사람이 결국 그렇게 변질 되고 배신하는 모습을 볼 때, 내가 그런 사람이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있을까요? 사도 중의 한 사람도 그렇게 행동했다면 나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안 할 자신이 있습니까?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 있다고해서 제자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를 보고도 자신의 헌신의 순수성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이 도리어 공동체의 큰 위기를 가져옵니다.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가룟 유다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진짜 문제 일 수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하나님이 당장 이 사람을 제거해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이 모든 죄를 묵인 하고 방조하는 것처럼 보여서 답답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렇게 두신 이유를 달리 생각해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저렇게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비난과 제거가 답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고 헌신의 순수성을 회복하는것이 진짜 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론 가룟유다가 있는 것이 더 건강한 공동체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아마 사도들은 평생 동안 가룟 유다를 자신의 경계로 삼았을 것 입니다. 자기들 중의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나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통해서도 일하심 세번째로 예수님이 가룟유다를 사도그룹에 허용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악을 통해서도 얼마 든지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는 악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선한 사람들의 헌신과 믿음으로만 일하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누가 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모든 사업들이 중단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에 의해, 우리 안에 있는 가룟 유다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드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얻기 위해 팥죽 한 그릇을 형을 속이고,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해 해서 맛있는 고기를 먹고 그에게 복주고 할 때, 리브가는 야곱과 편을 짜고 에서인 것처럼 해서 복을 갈취합니다. 이 일에 어느 누구하나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오로지 전부 자기 욕심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사람의 순종이 아닌 불순종과 이기심으로도 성취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언제라도 뒤집어 놓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 이루실 새로운 교회,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이 가룟 유다 한 사람으로 인해 무너질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소용없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판단은 우리의 인간적 생각에 불과합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있다고 해서 하나 님의 계획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반대하거나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할수 없고 그 어떤것도 그런힘을 가지지 못합니다.

지난 날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수많은 핍박과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로마제국하에서 교회는 수 많은 순교자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 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정말 가룟 유다가 문제입니까? 이것만 없으면 다 잘될 수 있는 것 입니까?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놀라운 구원 역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저런 가룟 유다를 두셨는가라 고 원망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어렵게 돈을 모아서 조그만한 세차장을 인수해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작은 세 차장인데 열심히 하다 보니 단골 손님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달 회원으로 20-30만을 내고 가입하면 10번 닦는데 11번을 닦아 주고 서비스로 20만원 이상 되는 코팅까지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자 점점 회원가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한참 이렇게 돈을 벌고 있는데 어느날 날벼락을 맞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차장 건물 주인이 부도를 내고는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건물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권리금도 못받고 당장 쫓겨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이 마음이 너무 상해서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에 그 집사님에게 대뜸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건물을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려나보다”

처음에는 “설마”하다가 이 집사님의 믿음이 참 순수해서 그것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몇 번의 경매를 통해 아주 싸게 그 건물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악독한 주인이 자신에게 건물을 가져다주는 주인이 될 지 누가 알았을까요?

우리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일이 많은 것을 봅니다. 일이 잘 되려면 이런 사람,이런 일들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 할 것이 아니라 가룟유다 같은 사람도 이어야 십자가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한국에서 교회들이 신천지를 통해 온갖 피해를 입고 힘들어 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이단 들이 득세 하도록 내버려두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이들의 죄를 허용해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터질 때 신천지 이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교회 안에서 집단 감염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신천지를 통해 경고받게 되고, 교회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비난들이 신천지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신천지교회가 이단이라는 것이 전 국민에게 다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 명단이 다 공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가룟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없어졌으면 하는 사람과 일들, 혹은 그런 종류의 문제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알고 보면 나에게 복이 되는 사건이라는 것을 꼭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서, 교회에서, 혹은 가족속에서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 들이 있어 싸움과 갈등, 배신과 상처로 종종 우 리의 삶이 얼룩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 게 해서든지 없애버리는 것만이 답인 것처럼 보이고, 이것을 침묵하시는 하나님에게 도리어 답답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없애버리면 답이 나올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가룟 유다를 통해 우리의 생각 을 바꾸어서 바라보면 어떨까요? 알고 보면 복 덩어리입니다. 알고 보면 나의 거울입니다. 알고 보면 나같은 자도 받아주신다는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이런 나를 누가 한번 더 품어준다면 나는 어떻 게 할 것 같습니까? 그 품는 자가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교회에 하나님이 더 많은 사람들을 보내어 은혜와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일들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이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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