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긴급 속보가 타전되었다. 지닌 토요일인 7일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 하마스가 남부 이스라엘에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총리는 지난 8일 공식 성명을 내고 무력 분쟁을 공식화했다. 즉각적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10여 시간만에 양측은 약 3,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마스는 가자에서 텔아비브를 포함한 주요 도시에 로켓 공격을 재차 가했고, 이스라엘군은 이스라엘 도시에 침투한 무장 세력을 제거하려는 시가전을 벌였고, 한편 가자 지구에 전기와 수도의 공급을 끊었고, 가지 지구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예고했다.
전세계는 얼마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멀리 떨어져 있고 두 나라간의 전쟁이라 뉴스를 통해 이따금 소식을 듣는 정도였지만 전쟁의 여파는 두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피해와 어려움은 곡물 가격의 가파른 상승으로 작용했고, 얼마 지나자 생활비 자체가 껑충 솟구쳤다. 꼭 전쟁의 여파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지만 부정적 영향력을 전세계에 미쳤고, 어려운 사람들이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의 포화를 울리고 있다. 이 전쟁은 현재 확전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그 여파 또한 고스란히 전세계에 미칠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은 어떤 누구보다도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다. 물론 당사국들의 엄청난 댓가 지불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전쟁의 시대에 우리 나라 또한 전쟁 종식 국가가 아니라 잠재전쟁지역이라는 사실은 무서운 진실 앞에 직면하게 된다. 전쟁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런 전쟁의 시대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같은 단어가 있다. 바로 ‘희망’이라는 말이다. 전쟁의 시대에 희망이 더욱 그리워하는 것은 염원이 살아 숨 쉬는 출구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전망이 자욱한 시기이기 때문에 희망이 별빛처럼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다. 어두울수록 희망이 포착되는 것이다.
몇일전 늦은 저녁, 작은 아들을 학원에서 픽업해서 집으로 가는 중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아들에게 물었다. “요즘은 별이 안보인다~” 그 말에 아들이 답한다. “아빠, 도시 불빛이 너무 많아서 별이 안보이는거 아닐까. 지금도 시골에 가면 별들이 엄청 반짝거릴 껄”. 아들의 이야기는 도시에는 불빛이 너무 많아 밤하늘의 별빛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CNN 등의 외신 매체를 통해 실시간 접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분노할 수 있는지, 보복은 어떤 보복을 부르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화면을 통해 참상을 간접적으로 보고 듣는 것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자신의 절규이고, 가족의 비명소리이며, 이웃의 울부짖음일 것이다.
성경 속에도 전쟁의 절규 속에서 부름 받은 선지자가 있었다. 바로 선지자 미가였다. 미가는 모라셋이라는 시골의 별볼일 없는 집의 아들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전쟁의 참상을 보았던 미가의 비명은 자기 가족에 대한 울부짖음이었고, 바로 옆집의 절규였다. 그런 처연한 현장에 하나님은 미가를 선지자로 부르셨다.
먼저 미가는 자신이 겪었던 분노와 보복, 절망이라는 프레임으로 나라를 보았다. 미가는 자신의 부정적 프레임 안에는 빛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보복과 분노만 가득한 죽음의 골짜기뿐이었다. 희망은 압도적인 악함 앞에서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산산조각 나는지 보았다. 부조리와 욕망, 보복과 분노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되어 굴러갈수록 점점 더 참혹함만이 커져갈 뿐이었다. 미가는 인간은 보복과 분노, 욕망의 늪지에서 스스로 헤어나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한다.
전쟁의 시대 속에서 미가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다. 민족들을 참되게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평화의 시대의 도구를 만들고 전쟁 연습을 하지 않는 나라가 되는 희망을 전달받았다.
연습은 훈련이고, 훈련은 반복이며, 반복은 경험과 시간의 축적이다. 그래서 개인이나 국가가 무엇을 연습하고 있는가? 를 보면 지향점을 가늠할 수 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새로운 무기, 더 강철같은 무기를 만들고, 피땀 흘려 벌어들인 돈으로 더 파괴적인 무기를 사들이며, 새로운 무기 사용 방법과 훈련을 익히느라 시간을 다 써버린다. 이것은 전쟁을 연습함으로 악순환을 반복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런 전쟁은 멀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 영역에서도 여당과 야당은 무섭게 싸운다. 같은 나라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폭언과 저주 섞인 선전을 한다. 이로 인해 국민들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는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 혐오와 정치 외면이라는 악순환만 일어난다.
왜 그러한가? 가만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도 친구들을 경쟁자라고 가르쳤다. 선의의 경쟁자일 수도 있지만 친구들을 나의 관계 영역 밖으로 밀어내는 사고를 했던 것이다. 조금만 다르면 배제와 외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합리화했다. 그러니 전쟁의 시대에는 정서 속에 나와 다른 이해 관계이면 누구든 밀어내고 경쟁하며 다투는 연습한 셈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을 경쟁자로, 나와 다투는 사람으로 교육받았는데 상대방이 나를 친구로 생각할까?
전쟁을 개인의 삶에 비추어보면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목사와 성도, 사장과 직원 간에 경쟁과 다툼으로 환원된다. 그런데 미가는 다툼과 경쟁을 연습하지 말고 화목하게 사는 연습을 하라고 선포한다. 이 세상은 전쟁과 다툼의 터전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화목과 상생의 터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관계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는 자기 중심성을 내려 놓고, 자르고 찌르는 칼과 창을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그렇다. 전쟁의 시대에 우리가 가정 안에서, 이웃들과 직장과 일터에서 다툼과 경쟁을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상생과 화목을 연습하는 것이 희망을 발견하는, 희망을 키워가는 첩경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밥상을 보존해주고, 먹거리를 함께 생산하는 쟁기와 낫으로 변화시켜 가는 세상을 나의 사람 안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런 희망의 자리에서 자녀들이 자라나고 커가는 꿈을 꾸어본다. 전쟁과 다툼 연습이 아닌 화목과 희망을 연습하는 삶으로 가정과 일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김광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