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함으로 연결되는 종과 주인의 관계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순종하는 모습의 세번째 예시는 종과(doulos: slave)과 주인(kyrios: master)의 관계입니다. 복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에 종과 주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합니까? 특별히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1세기의 종과 주인의 관계를 어떻게 현대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바울의 직업 윤리를 통하여 우리들의 일터에서 어떠한 직업 윤리를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엡 6:5) 종들이여, 육신의 주인들에게 순종하기를 두려움과 떨림과 여러분들의 마음의 진실함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하십시오] (6) 사람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처럼 눈속임으로 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시오 (7)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좋은 태도로 섬기십시오 (8) 왜냐하면 그가 종이든 자유인이든 선한일을 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각각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9) 주인들이여, 여러분들도 위협을 그만두고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들과 여러분들의 주인이 하늘에 계시고, 그는 그들을(종과 주인) 편견으로 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Translated by YG Kim)
먼저 우리들이 1세기의 노예 제도(Slavery)를 잠시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노예들은 전쟁의 포로였습니다. 그리고 인신 매매에 의해 유괴(誘拐)와(딤전 1:10), 부채(負責)의 문제 그리고 노예의 부모에 의해 출산된 자녀들이 종이 되는 경우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세기 교회의 상황을 생각해 보아도 종과 주인의 관계는 갈등 가운데에서 있었고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이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습니다(엡 6:5-9; 골 3:22-4:1; 딤전 6:1-2; 딛 2:9-10). 또한 사도 베드로도 자신의 서신에서 종과 주인의 관계를 언급합니다(벧전 2:19). 1세기의 상황 가운데에서 노예들은 주인의 재산으로 구분이 되어서 노예들의 생명권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만일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쳤다가 잡히게 되면 그들에게 ‘도망자’라는 낙인을 찍고 도망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노예의 신분에서 도망친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 내용을 생각해 보면, 종이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은 큰 복이었습니다(몬 1:8-22).
이러한 배경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종과 주인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종의 입장에서 주인을 섬기는 태도를 언급하고(엡 6:5-8) 난 후에 주인의 입장에서 종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언급합니다(엡 6:9).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종이 주인을 섬기는 태도는 크게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종은 육신의 주인을 섬길 때에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모습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미 생각해 본 바와 같이 1세기의 두 가지 순종의 개념 가운데에서 바울은 종과 주인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처럼 ‘아래에서 듣다’라는 의미로 ‘휘파쿠어’(hypakouo)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종이 육신의 주인을 섬기는 모습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습처럼 해야 합니다.
이러한 순종의 모습을 바울은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 바로 두려움(phobos: fear)과 떨림(tromos: trembling)과 종들의 마음 안에 있는 진실함(haplotes: sincerity)으로 주인을 섬기는 모습입니다(엡 6:5).
먼저 종이 자신의 육신의 주인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성도가 그리스도를 두려워 하는 모습과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두려움의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공포(dread)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모습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권위를 인정할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진다고 말씀합니다(e.g., 출 18:21; 신 10:12; 시 47:2; 사 8:13).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는 일들과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거룩함(holiness)과 왕권(majority)을 인식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절대적인 실체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인한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에 관한 충성도(loyalty)에서 나타나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주인을 향한 종의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충성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으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인을 향한 종의 두 번째 태도로 ‘떨림’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하나의 짝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고전 2:3; 고후 7:15; 빌 2:12; 엡 6:5). 그 이유는 떨림이란 두려움이 외부로 표현될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달은 성도들이 복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도 적용이 되어집니다. 종이 주인을 향한 충성심에서 나타나는 두려움이 외부로 표현될 때에 떨림이 나타나는 것은 종이 주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종의 세 번째 특징은 마음의 진실함(sincerity)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길 때에 나타나는 진실함이란 자신의 주인을 향한 올바름(straightness)과 솔직함(openness), 그리고 숨김(hidden meaning)없이 주인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종이 자신의 육신의 주인을 섬기는 두 번째 특징과도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두 번째 특징은 주인 앞에서만 올바르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눈속임’(ophthalmodoulia: eye-service)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언제나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이 자신의 일터에서 일하는 모습입니다. ‘눈속임’으로 번역할 수 있는 ‘eye-service’란 무엇입니까? 눈속임이란 종이 자신의 주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위선적인 모습으로 일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태도는 일시적으로 주인을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주인을 섬기는 종의 태도에서 두려움과 떨림의 모습 가운데에서 진실됨이 빠져 있으므로 이러한 종의 모습은 주인을 향한 진실된 순종의 모습이 배제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종이 주인을 섬길 때에 그리스도의 종으로 좋은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습으로 주인을 섬기라고 권면합니다(엡 6:6b). 특별히 6절 하반절에서 ‘영혼’(psyche: soul)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가 ‘마음’으로 번역이 될 때에 그 의미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측면 가운데에서 사람의 감정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의 마음은 주인에게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주께 하듯이 좋은 태도(eunoia: good attitude)로 주인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의 마음이 태도로 표현되어질 때에 그 태도는 종과 주인이 좋은 관계(good relationship) 속에서 자발적으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종은 왜 주인을 이러한 태도로 섬겨야 합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종이 자신의 주인을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마음 속에 있는 진실함으로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종이 섬기는 모습이 주인 앞에서 보여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까지 보시고 선한 일을 하는 종들에게 보상해 주십니다.
바울은 종과 주인의 관계를 설명하면 ‘자유인’(eleutheros: free)이라는 단어를 중간에 삽입해서 이러한 원리가 종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고 말씀합니다(엡 6: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각 사람의 행함대로 보상해 주십니다.
바울은 9절 상반절의 말씀에서 주인의 입장에서 종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언급하는데 주인들은 종들을 향한 위협(apeile: threat)을 버리고 종들이 주인에게 하는 동일한 방법으로 행동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종과 주인을 편견(prosōpolēmpsia: partiality)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공평하게 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편견’이라는 헬라어 명사는 ‘얼굴’(prosopon: face)이라는 명사와 ‘받다’(lambano: to receive)라는 동사가 결합되어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편견이란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편견이 아니라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의 선한 행동입니다.
<함께 나누기>
- 우리들은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종과 주인의 관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의 직업 윤리에 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종의 모습은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에서 진실함으로 주인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성도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우리들은 직업 윤리에서 진실함으로 모든 일을 대하고 있습니까? 거짓이 없는 진실함은 우리들의 일터에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옵니까?
- 기독교인들의 직업 윤리 가운데에서 ‘눈속임’으로 표현되어지는 ‘eye-service’는 조심해야 하는 자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상사들의 눈에 보이려고 노력하기 보다 언제나 동일한 자세로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하는 모습 가운데에서 이중적인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 기독교인들의 직업 윤리 가운데에서 일을 대하는 좋은 태도는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직장의 상사들과 좋은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습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들은 좋은 태도로 직장에서 행동해야 합니까?
- 바울은 종의 주인들에게도 동일한 모습으로 종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직장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하면 어떻게 직장의 동료들을 섬기고 있습니까?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