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 (Hypocrite), “위선자”
“외식” 혹은 “위선”로 번역된 히랍어 “히포크리테스”의 어원은 “깊은, 은밀한”을 뜻하는 “히포”와 “좋고 적합한 생각”를 뜻하는 “크리노마이”의 합성어입니다. 마음 깊은 은밀한 곳에서 나오는 개인의 의견을 “히포크리테스”라 했습니다.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는 없었고, “비밀적인 세계 혹은 꿈을 해석하다, 신들의 계시를 설명하다”였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 단어를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제로 표현합니다. 아폴로 신전의 여사제 피티아 (Pythia)는 신탁을 받아서 제국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앞날의 운수와 길흉을 예언하는 자였습니다. “히포크리테스”는 신탁받아 백성들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이 낱말을 “응답하다” 혹은 “대답하다”로도 사용합니다. 그의 명저『역사』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 전복을 꿈꾸던 아리스타고라스는 그리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클레오메네스를 찾아가 제안합니다. “당신들이 이 도시를 점령한 후에는 부의 문제에 관해 용기를 가지고 제우스와 경쟁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들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 없이) 당신들이 아시아 전역을 쉽게 통치할 수 있습니까?” 아리스타고라스의 말을 듣고 클레오메네스는 “당신에게 답변을 내일로 미루겠소.” 이곳에 사용된 답변하다는 단어는 히포크리테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헬라 사회에서 “외식”의 동사형인 “히포크리노마이”는 꿈을 “해석하다”로 사용되었습니다. 호모의 글에 이 낱말은 꿈을 해석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름다운 페넬로페는 국가의 영웅이자 남편인 율리시스에게 자신이 지난 밤에 꿨던 꿈을 해석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부인의 꿈 이야기를 듣고 율리시스가 말합니다. “부인, 이 꿈을 왜곡 해석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코 바랍직하지 않소. 나는 그 꿈이 진실이라는 것을 당신에게 보여 줄 것이요.” 그러자 현명한 페넬로페가 남편에게 다시 대답합니다. “모르는 말씀, 꿈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분명하고 어떤 경우라도 그것이 모두 성취된다고 믿는 것은 지혜롭지 못해요.” 이들의 대화에서 사용된 꿈의 해석이 “외식하다”입니다.
꿈이나 신탁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이 단어는 본래 말을 했던 주체와 전달하는 사람이 서로 다른 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무대에서 연극하는 배우를 의미하게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배우들처럼 동일한 사람이 말도 하고 연극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무대 뒤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하고, 무대 위의 배우는 그 말을 듣고 행동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극 배우는 극중 인물과 같은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관객들이 보는 얼굴도 배우의 진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마스크를 한 가짜 얼굴의 배우를 “히포크리테스”라고 불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 단어는 속과 겉이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발전됩니다. 말과 얼굴이 자신의 것이 아닌 무대 위의 연극 배우처럼, 말과 행동이 마음 속과 다르게 표현하는 사람을 히포크리테스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이 단어의 의미를 매우 분명히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에서 역할을 맡았지만 실제의 삶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성경 어휘에서 이 낱말은 부정적인 용어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든 위선자는 언제나 비난을 받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아닙니다. 그들은 폭풍이나 맑은 날씨같은 기상은 분별하지만 하나님의 질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자신들의 동물들은 돌보지만 사람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구제할 때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해 사람 앞에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금식할 때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얻으려고 초췌한 표정을 합니다.
위선에 대한 성경의 모든 언급은 하나의 내용에 집약됩니다. 그것은 경고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위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을 알립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위선자들의 일곱가지 행위를 “화 있을진저”의 형식 (formula)로 나열합니다. 이 목록을 “일곱 저주”라고 부릅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도 천국 못들어가게 하고 자신도 못들어 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개종시켜 자신들처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인간의 전통을 따르게 하는 그릇된 지도입니다. 넷째는 온갖 사소한 것에 얽매여서 진정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리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겉만 화려하게 하면서 내면을 부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죄악을 은혜하기 위해 영적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신앙의 전통을 전수 받았지만 자신의 삶에 전혀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선에 대하여 두 번 언급을 합니다. 첫번째는 베드로의 위선입니다. 그가 개종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때, 그곳에 유대인들이 들어 오자 베드로는 몰래 물러갑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그가 유대인들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믿음으로 한 가족이 된 이방인을 멀리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같지만 속은 유대 율법에 빠져 있는 베드로의 행동이 위선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합니다.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언급한 위선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입니다. 바울은 도덕적 문제들에 민감성을 상실해서 거짓말 하는 자들을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이 위선의 뿌리는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순응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베드로의 글 속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 되는 위선의 여러 모양들이 언급됩니다. 그는 신앙인들에게 모든 악의, 모든 간사함, 모든 시기, 모든 중상과 같은 죄와 함께 지내는 위선을 버리라고 경고합니다. 대신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짓 없이 진실하게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곳에 언급된 거짓 없는 진실은 위선이 없다는 단어 “안히포크리토스”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 복종하겠다고 말하지만 실제의 삶에서 순종이 없는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은 무엇이라 칭할까요?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