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개의 방주(창세기 6:13-22)
위니펙임마누엘교회 이보성 목사
이젠 오래 된 영화이지만 아직까지도 감동이 되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을 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2차 대전 말기 폴란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오스카 쉰들러라는 사람의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입니다.
쉰들러는 독일의 나치 당원으로서, 폴란드에 가서 에나멜 무기 공장을 경영했던 사람입니다. 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되는 것을 보고 나치 당원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막대한 돈을 들여서 독일 군인들과 흥정을 해서 유대인들을 사서 자기 공장에서 일하게 하면서 1,1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구해 줍니다.
4시간 가까이 상영되는 이 영화는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구성이 잘 되어 있어서 장면마다 감동을 줍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의 끝 장면을 보면서 가장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쉰들러는 자기의 승용차를 보면서 저것을 팔았더라면 유대인 10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시계와 결혼 반지를 팔았더라면 유대인 2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더 많은 유대인들을 살려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영화가 끝나게 됩니다.
독일 정권이 전쟁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목숨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살리는 쉰들러를 보면서 잃어버린 한 양을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본래 이 영화의 원제는 쉰들러의 리스트(Schindler’s List)가 아니라 쉰들러의 방주(Schindler’s Ark)였다고 합니다. 쉰들러의 방주에 탄 사람들은 다 살아남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저는 이 방주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 합니다. 얼마 전에 자녀들과 함께 미국 켄터키 주에 있는 Ark Encounter 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를 실제 크기로 재현한 곳입니다. 근처에 창조박물관(Creation Museum)까지 있어서 기독교인이라면 꼭 한 번 가 보시기를 강력 추천하는 장소입니다. 방주는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현대에는 교회로 연결을 시킵니다.
그래서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어로 방주는 테바라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테바라는 단어가 성경에 2군데 사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노아의 방주입니다. 둘째는 모세의 방주입니다. 모세의 방주는 사실 방주라기보다는 갈대상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세가 탔던 갈대상자를 상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분명하게 테바, 방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의 방주가 필요하게 되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적으로 타락했고, 생각과 계획하는 모든 것이 악했으며, 강포가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실 계획을 갖고 구원 받을 사람들을 위해 방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모세의 방주가 필요한 시기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힘들게 일하며 고통받던 시기입니다. 특히 바로가 아이들을 전부 죽이기로 선포한 상황입니다. 노아의 경우처럼 죄악의 상황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지도자인 모세를 구원할 방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방주는 둘 다 구원의 역할을 하는 방주입니다. 하지만 그 방향은 다릅니다. 죄악 가운데에서 구원하는 것이 노아의 방주가 맡은 역할이고,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구원하는 것이 모세의 방주가 맡은 역할입니다. 방주는 교회와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방주가 했던 역할이 바로 현재의 교회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노아의 방주처럼 교회는 구원 받을 사람들을 위해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말은 구원받을 사람들이 와야 하는 것이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는 교회, 그것이 올바른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가 부흥해서 교인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
는 것은 아닙니다. 수평적으로 다른 교회에 있던 사람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고양육을 받아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땅의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구원의방주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 한 가지, 교회는 모세의 방주처럼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모세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어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방주를 통해 살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는 모세 혼자 방주를 만들 수 없었고, 자신 혼자의 힘으로 살아날 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의 방주는 모세의 부모가 만들어 주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방주에 태웠습니다. 이런 일은 이제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모세의 부모처럼 도와주는 사람들로 인해 어려웠던 상황을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먼저 중보기도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6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도와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방주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두 방주 모두 방주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방주를 만들어 주시고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직접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노아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들 편한 데로 자신들 상황에 맞게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치 판단은 땅에 떨어졌고, 세상적인 가치 판단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살고 있었음에도 노아는 의인으로서 온전한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만은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말씀하셨고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방주의 규격까지 정확히 가르쳐 주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방주의 크기와 재료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마지막 작업으로 중요한 한 가지를 당부를 하십니다. 바로 역청을 칠하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작업으로 시킨 역청을 바르는 작업입니다. 역청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막아서 물이 안으로 못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방주도 마찬가지로 역청과 나무진을 칠했습니다. 역청이 하는 역할처럼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상황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이민 땅에서 우리는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고,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항상 쪼들려 삽니다. 그러다 보니 “이민생활이 다 그렇지, 이민교회가 다 그렇지”라는 말을 쉽게 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민사회로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민교회이기에 더욱 더 구원과 어려움에 함께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려웠던 상황을 극복하고 방주를 만든 것이 바로 노아의 가족과 모세의 부모였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무기력하던 시대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모두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를 나일 강에 던질 때, 모세의 부모는 방주를 만들어 모세를 살려 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게 하셨고, 특히 요게벳은 보모가 되어서 자신의 아이를 직접 키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아이를 키우면서 월급을 받으면서말입니다.
우리가 노아와 같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요게벳처럼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고 세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개인이, 그리고 우리가 속한 교회가 이렇게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주로, 어려움을 도와주는 방주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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